콥트 정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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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새로운 신앙인 그리스도교는 2세기 말까지 이집트에 잘 정착되었지만, 이교 신앙과 계속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서기 190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부활절 날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 및 안티오키아 교회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이집트 북부 델타 지역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산하 교구가 40곳이 있었습니다. 서기 202년, 나일 계곡 위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상이집트의 테베 전역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오스(Saint Athanasios)는 서신에서 사막의 한가운데 있는 크고 작은 오아시스들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다고 언급했습니다.
순교자들의 교회
역사학자들은 콥트 교회를 가리켜 ‘순교자들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단지 순교자들의 숫자가 많아서뿐만 아니라 순교에 대한 그들의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카타콤베(지하 묘지)로 숨어들기보다는 공개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의 물결
제1차 박해는 1세기에 일어났으며, 성 마르코 사도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이교도들의 손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서기 202년부터 시작해 7년에 걸쳐 콥트 교회는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재위기간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교가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그곳의 총독에게 더 심한 박해를 주문하고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전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학교는 폐교되었고 학장이었던 성 클레메스(St. Clement)는 급히 피신하였습니다.
로마 황제 데키우스는 국가종교를 재건한다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서기 257년부터 258년싸지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교회를 파괴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파파 디오니시오스(Pope Dionysios of Alexandria)를 체포해 유배를 보냈습니다. 서기 302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한 모든 군인을 해임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다음해 2월 23일,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에서 그리스도교를 분쇄하면 다른 지역에서도 그리스도교를 처리하는 게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훨씬 강도가 셌습니다. 남녀노소 약 80만 명이 이집트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콥트 교회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한 서기 248년을 ‘순교자들의 해’(Anno Martyrii)라고 부르며 교회력 원년으로 정했습니다.
이러한 박해들을 연이어 겪으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이 마음을 다잡게 하고, 감옥에 갇힌 그들을 찾아갔으며, 법정은 물론 처형 장소에까지 그들과 함께하며 헌신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성인들의 유해를 맡아 관리하고 안장했으며, 자신들의 눈으로 본 그들의 재판장에서의 모습과 순교를 글로 남겼는데, 이를 ‘순교자 행전’이라고 부릅니다.
유명한 순교자들로는 성 메나 기적자(Saint Mena the Wonder worker), 성녀 레플카(Saint Reflca)와 그녀의 다섯 자녀들, 성녀 카트린(Saint Catherine), 이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스위스에서 전원 순교한 성 모리스(Saint Maurice) 휘하 테베 군단(약 7천 명) 등이 있습니다. 콥트 정교회의 순교자 목록에는 끝이 없습니다.
교회의 분열
5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 수도원의 대수도사제(archimandrite) 에우티케스(Eutyches)가 새로운 이단을 퍼뜨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human nature)을 부인한 그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단지 성모 마리아의 태중을 빌리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 플라비아노스(Flavianos)를 필두로 일곱 명의 주교가 지역 공의회를 소집하여, 로마의 주교 레오 1세(Leo I)의 교의서간에 힘입어 에우티케스를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그러자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든 주교와 황제 테오도시우스에게 항소했고, 그 결과 서기 449년,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가 소집됐습니다. 이 공의회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파파 디오스코로스(Pope Dioscoros of Alexandria)를 의장으로 하여, 130명의 주교가 참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베날리스(Juvenal of Jerusalem)와 안티오키아의 돔노스(Domnus of Antioch)도 참석했습니다. 에우티케스는 니케아 신경을 온전히 고백하는 글을 제출하여 정통으로 인정받고,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주교들은 레오의 교의서간을 근거로 에우티케스를 판결한 주교들을 파문했습니다. 그러나 에우티케스가 나중에 다시 자신의 이단 사상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지역 콥트 공의회에 의해 단죄되어 파문됐습니다.
2년 후인 서기 451년, 칼케돈에서 황제 마르키아누스에 의해 다시 공의회가 소집됐습니다. 이 공의회는 정치적 요인에 의하여 알렉산드리아 교회와 파파 디오스코로스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반대 음모로 특정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서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 비하면 일개 지방 도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이자 파파들은 그리스도교 1세기 동안 신학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콥트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 전달되어 마치 에우티케스주의와 동일한 주장을 펴는 것으로 오해됐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에우티케스를 사면한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를 주재했다는 이유로 에우티케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콥트 공의회가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단죄하고 파파 디오스코로스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정통 신앙을 입증했음에도 말입니다.
“백열로 가열한 쇠붙이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두들길 때, 비록 백열과 쇠붙이가 나뉠 수 없는 하나가 될지라도 쇠망치에 맞는 것은 백열이 아니라 쇠붙이입니다. 강생(降生, Incarnation)하신 우리 구세주의 인성(人性, Humanity)과 신성(神性, Divinity)은 마치 쇠붙이와 백열이 결합한 것처럼 절대 한순간도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성과 인성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그 두 본성의 결합이 쇠붙이와 백열의 결합처럼 혼합이나 융합, 변화는 아닙니다. 이 결합은 요한 성인이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강생하신 로고스이신 하느님의 하나의 본성’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만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인 정통 교회의 신앙을 변함없이 고수할 뿐입니다. 에우티케스나 다른 그 누구도 나로 하여금 이 거룩한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파파 디오스코로스의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자, 이번에는 이집트의 옥수수가 제국의 다른 곳으로 수송되는 것에 반대하는 등 세속적 문제를 가지고 그에게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파파 디오스코로스와 민간 심사위원단 모두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특히 파파 디오스코로스는 당시 가택연금 상태였기에 공의회로부터 세 차례나 호출을 받았지만, 나가지 못해 결국 로마의 주교가 내린 파문에 따라 성직 박탈이라는 결정을 받게 됩니다. 파파 디오스코로스는 정통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직품이 강등되거나 파문될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대한 문제를 주도해 다루었습니다. 이집트 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하나 된 본성(이 표현이 우리 주님의 인성이나 신성 중 어느 한쪽을 무시한 것으로 심한 오해를 받기는 했으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에우티케스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비춰져 ‘단성론자’(monophysite)라는 딱지가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콥트 교회의 전례 및 교리를 놓고 보면, 오늘날까지 콥트 교회의 정통성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때 콥트 교회를 의미론적 문제에서 발생한 오해로 단성론자라고 비난했던 이들이 지금은 ‘강생하신 로고스이신 하느님의 하나 된 본성’이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두 본성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한 것임을 인정하고 ‘합성론자’(miaphysite)라고 불러주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대표가 부재한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성명과 교회법을 통과시켰는데, 콥트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인도 정교회 등 고대 교회들은 오늘날까지 이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칼케돈 공의회는 분열될 수 없는 그리스도교회의 첫 번째 분열을 가져온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 학자들은 칼케돈 공의회에서의 불상사와 결정들이 정통성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단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데 동의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본성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공의회 사건은 칼케돈과 통치자들의 손아귀 아래 있는 콥트 교회에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주었으며, 이후 20세기까지 콥트 교회는 다른 그리스도교 세계로부터 격리됐습니다.
파파 디오스코로스는 소아시아 앞바다에 있는 창키리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안식하였습니다. 유배 중에도 그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해 그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의 주교좌인 알렉산드리아 주교좌는 칼케돈파(그리스) 총대주교가 들어와 차지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그를 거부하고 여전히 유배된 총대주교를 따랐습니다. 그로 인해 박해가 일어나 약 3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非) 칼케돈파인 콥트 교회는 비잔티움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계속 박해를 받았으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내부의 분열은 더욱 벌어졌습니다.
거의 150년 동안 아홉 명의 비잔티움 황제들의 통치 아래, 이집트는 평화와 억압을 번갈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죽음 이후, 비잔티움의 박해와 탄압의 시기는 거의 12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총대주교들은 유배를 가고, 침입자들이 총대주교좌를 차지했으며, 성당들은 파괴되었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모든 성당을 폐쇄하고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입구에 감시병을 세워두는 등 콥트 교회에 대한 박해를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는 궁핍한 지역으로 추락한 반면에 동로마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은 사치와 자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아랍 정복
이슬람교가 이집트에 들어오면서 지난 13년 동안 총대주교좌에 떠나있던 제38대 총대주교 파파 벤야민 1세(Pope Benjamin I)가 콥트인들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복귀해 모든 성당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아랍의 이집트 정복 이후 4세기 동안 콥트 교회는 번창했으며, 이집트인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다음과 같이 특별히 친절하게 대하라고 당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집트를 정복한 이는 콥트인들을 친절하게 대우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너희가 보호할 대상이며 일가친척이다.” 그리하여 콥트인들은 지즈야라는 특별 세금을 낼 경우, 보호대상으로서 자유롭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어도 되었습니다. 세금을 지불할 형편이 되지 못한 사람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보호받을 권리를 상실할 상황에 처했는데, 후자의 경우에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서기 750년에서 868년과 905년에서 935년의 아바스 왕조 통치 아래 세금이 인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콥트인들은 번영했으며 콥트 교회는 가장 평화로운 시절을 누렸습니다.
이 시기 동안 콥트어는 이집트어의 위치로 남아 있었고, 11세기 말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전례 필사본에서 콥트어와 아랍어를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아랍어가 도입되는 과정은 지지부진했으며, 15세기에도 콥트어는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콥트어는 여전히 교회의 전례 언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상황은 제2천년기가 시작되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콥트인들은 지즈야 세금 외에도 특별제한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는 신앙의 자유를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콥트인들은 오래된 성당의 보수 및 새 성당 건설과 법정에서의 증언, 공적 활동, 입양, 재산 상속, 공공장소에서의 종교활동, 복장 규정에 대한 제한을 받았습니다.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히, 12세기 말까지 이집트는 그리스도교가 주류인 나라에서 이슬람교가 주류인 나라로 변해갔습니다. 콥트교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머물렀고 주기적으로 적대적인 이슬람교도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콥트인들의 처지는 19세기 초 모하메드 알리 왕조의 안정과 관용 아래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콥트교 공동체를 행정단위로 따로 분류하는 것을 중지했습니다. 1885년에는 콥트인들에 대한 차별을 상징하는 지즈야 세금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콥트인들도 이집트군에 복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서기 1919년, 이집트 혁명은 현대 이집트 사회 화합의 산증인입니다. 오늘날 콥트인들에게 자행되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박해와 테러, 폭력 등에 반대하며 이집트 사회를 하나로 단결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이 화합입니다.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콥트 교회는 결코 이집트 정부에게 장악되거나 통제받지 않았습니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에 관한 교회의 입장은 주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마태오 22:21) 콥트 교회는 결코 공권력에 강하게 저항하거나 폭력을 쓰지 않으며, 어떠한 권력과도 결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마태오 26:52)
Original text : http://www.copticcentre.com/the-coptic-orthodox-church/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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