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왕" 프란츠 요제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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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로트와 제국의 공간- 『라데츠키 행진곡』에 나타난 중심과 변방의 공간질서를 중심으로
Joseph Roth und Raum der Monarchie - Die Raumordnung von Zentrum und Peripherie in Radetzkymarsch
...실제로 제국의 변방인 갈리치아는 폴란드인, 루테니아인(Luthenen)이라고 불리던 우크라이나인과 독일인, 유대인들이 공존하는 다민족적 공간이었다. 갈리치아의 언어로는 독일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이디시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공식어는 독일어였다. 이 지역의 종교 또한 정교회, 로마 카톨릭교, 유대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발견되는 로마 카톨릭교 교회, 정교회 교회, 유대인 교회가 공존하는 국경도시의 모습, 그곳을 방문한 황제가 로마 카톨릭교 사제의 미사와 정교회 사제의 미사에 이어 유대인들의 축성을 받는 모습(347, 349)은 다양한 종교가 어우러졌던 갈리치아의 모습과 겹쳐진다.
“제국의 북동쪽,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경계Die Grenze zwischen Österreichund Rußland, im Nordosten der Monarchie”(256)에 위치한 작품 속 제국의 국경지역 소도시에 관한 묘사는 로트의 실제 고향인 갈리치아 브로디(Brody)의 공간지리적 특성과 닮아있다. 동갈리치아의 브로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가장 동쪽 변방에 위치하며 북동쪽으로 러시아 제국과 경계를 이루던 국경 지역의 소도시였다. 러시아 국경과 불과 14km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브로디는, 로트가 태어날 무렵인 1872년을 기준으로 할 때 동갈리치아의 렘베르크, 서갈리치아의 크라쿠프 다음으로 갈리치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였다.
브로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슬라브계인 폴란드인과 루테니아인이었지만, 주민의 80% 이상이 유대인이어서 브로디는 ‘제국 내의 유대 도시’로 불렸다. “갈리치아의 지방 도시들. 국경 도시들. 요새 도시들. 유대 도시들. 브로디는 그 중 하나였다"(Galizische Provinzstädte. Grenzstädte.Festungsstädte. Jüdische Städte. Brody war eine von ihnen)라고 기억되는 제국 동쪽의 변방 공간 브로디는 제국의 영토를 수호하기 위한 수비 도시이기도 했다.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동부 국경 지역에서 열리는 추계 기동훈련을 참관하기 위해서 그곳을 방문한 황제가 자신을 “예루살렘의 왕König von Jerusalem”(349)이라고 인식하는 장면은 실제 역사적 사실에 의거한다.
--브로디는 1787년 카우니츠 Kaunitz 영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새 예루살렘 neues Jerusalem’으로 불리게 되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갈리치아를 방문하여 유대인들의 환호를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왜 ‘예루살렘의 왕’이라 불리는지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Vgl. David Bronsen: Joseph Roth. Eine Biographie. Köln 1974, S. 45, 104; NorbertLeser: Der zeitgeschichtliche Hintergrund des Werkes von Joseph Roth. In: Alexander Stillmark (Hg.): Joseph Roth. Der Sieg über die Zeit. Londonder Symposium. Stuttgart 1996, S. 3.
콜로미야Kolomea (갈리치아)의 유대인들이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 사도왕- 카를 1세를 접견하는 모습.
1917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1910년경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큰 공동체들 중의 하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오스트리아에는 전체 인구의 4.7%에 달하는 130만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슬로베니아인, 세1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루1마니아인보다 수적으로 더 우세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전 로트의 고향인 브로디의 인구는 18,000명이었으며, “갈리치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중 85%가 유대인이었다.
종교적 정체성과 결합된 민족 정체성을 지닌 유대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민족주의를 갖지 않는 소수민족"(Nationalität ohne Nationalismus)이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탈영토화된 민족’이었던 동부의 유대인에게 다민족 국가인 제국은 든든한 보호자이자 국가적 소속감을 보장해주는 ‘조국’으로 기능하였다. 아울러 국민국가로 거듭나 자민족의 영토와 국적을 갖게 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의 경우와 달리,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못한 민족인 유대인에게 제국의 해체로 빚어진 영토와 경계의 변경은 국가적 정체성을 앗아가는 사건을 의미했고, 이 점은 갈리치아의 동부유대인 로트에게도 해당되었다.
1994년작 드라마 "라데츠키 행진곡"의 한 장면- 수염을 길게 기른 유대인들이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행차에 예를 표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