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문현동 지하 어뢰공장 황금백합작전에 얼흰 금 500톤1000구의 원혼을 널리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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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호소 드립니다. 아래의 글은 한 개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한풀이의 글이 아닙니다. 지나간 역사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꽃 같은 조선 청년들의
원통함을 풀고 비틀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한 개인의 피맺힌 외침입니다.
바르지 못한 정권의 부도덕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비극입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정의와 양심을 기대합니다.
이 시대의 뒤틀린 업청난 사건을 국민에게 직접 판결을 받고자 하는 비장한 심정으로
올리는 글임을 말씀드립니다.
문현동 금도굴 사건에 대한 개요
2차 대전 막바지, 패전이 짙어가던 1945년 5월.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있던 각국
일본군 사령부에 일제히 명령이 하달된다. 전후 일본을 재건하고,내일의 일본을
기약하기위해 아시아 각국의 보물을 약탈하라는 일명 ‘긴노유리(黃金百合)’ 작전이다.
이에 중국방면군사령부는 각 지역에서 금과 국보급 문화재들을 싹쓸이하여 대련
항에서 부산항으로 보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계획한데로만 움직여주지 않았다.
일본군 중좌 미하라도시오(三原敏雄)는 일본인의 양자였던 조선인 최종욱에게
보물지도와 함께 약탈작전인‘ 긴노유리(黃金百合)’의 종착지를 가르쳐 주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 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이발사였던 박수웅에 의해 부산
문현동에서 본격적으로 보물 탐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박수웅은 세 명의 인부들과
함께 십여 년에 걸쳐 지하 수평 굴을 파 나갔다. 일제가 만들어놓은 지하어뢰공장을
관통시켜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그러나 보물 찾는 작업은 기약이 없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이리하여 박수웅은 결국 실패를 거듭한 끝에 포기해
버렸다.그 뒤를 이어 다큐 작가 정충제(필자)가 이 일에 뛰어들었다.
필자의 집념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2002년 3월2일. 지하16m 아래에 숨어있던
일제어뢰공장의 한 가닥인 수평 굴의 천정이 직경 60cm수직구로 관통되었다. 지상과
연결된것이다.이리 되기까지는 결정적으로 지하어뢰공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실체를
증명했던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 직접 제작 공수해온 최첨단 탐사장비의 덕택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은 직 간접적으로 미국의 CIA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일본군 대본영이 ‘긴노유리작전’을 실제로 지시했다는 지령문도 CIA가 미국방성
문서보관실에서 찾아낸적이있다. 이런 사실은 미 CIA극동 담당책임자였던
리챠드 롤리스와 필자와의 계약서에 잘 나타나 있다.
관통시킨 수직구 아래 수평굴속은 물에 잠겨 있었다. 수중카메라에 찍힌 영상에는
분명히 일제가 숨겨놓은 이등충(伊藤忠). 세 글자가 찍힌 황토색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마대 속에 든 것은 모두 ‘금편’이었다. 그때 필자가 본 금의 양을
필자는 천 톤 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변조된 굴속에 공간을 확인하고서 그렇게 추정
한 것이다.(참고로 금 1톤의 부피는 가로,세로,높이가 각 1자(尺)씩이다) 이 막대한 금과
함께 우리 대한민국 역사의 지울 수 없는 상처도 함께 발견되게 된다.
차가운 물속에 잠겨있는 거대한 어뢰공장의 지하공간 속에는 천구의 유골이 있었다.
진해 해군부 소속으로 징용영장을 받고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일제가 산채로 생매장
시킨 유골이었던 것이다. 끌려온 징용자들은 문현동 지하에서 두더지처럼 날마다
땅속을 팠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그리운 부모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땅굴 파는 일에 시달리던 이청년들을
일제는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 이들을 살려 보냈다간 그들이 목적했던 긴노
유리 작전이 모두 수포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보물을 일본까지 직접 가져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1943년부터 미 해군이 현해탄을 막고 있었기에 일본으로 가져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아무도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는 문현동
어뢰공장을 긴노유리 작전의 마지막 종착지로 선택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체 천명의
조선청년들은 햇빛도 통하지 않는 이 저주받은 지하동굴 속에서 산채로 생매장 당해
죽어 가야만 했다.잔인한 일본제국주의에 제물(祭物)이 된것이다.
스물 한 살부터 스물 다섯 살까지의 꽃다운 나이에 단지 식민지 땅에서 태어났다는
죄하나로 생매장을 당한 원혼들이다. 이제라도 늦지않다.햇볕 속으로 끌어 올리고
유골을 수습해야 한다. 지금도 성 노예 할머니들을 인정하지 않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는 일본을 불러 천명 조선청년들의 유골 앞에 무릎꿇리고 묻혀진 역사의 부끄러운
진실을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 역사의 진실 앞에 반성하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문현동 사건을 공론화 시켜야 하는 이유이다.이땅에 두발 디디고 사는
국민 한 명 한 명의 소명이며 의무인 것이다.
역사는 이 엄청난 사실을 뒤로 한 채 흘렀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질 이 사건은
우리의 현대사 만큼이나 왜곡되게 빗나가고 말았다. 필자는 이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그리고 엄청난 양의 금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쓰여 질 것이라는 포부로
십여년간이나 죽기살기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노력은 몇몇의 도둑떼와
국가 권력 앞에서 맥도 못추고 밟히고 부서졌다.
필자는 최초 발견자임에도 불구하고 배신을 당했다. 필자의 조수 삼천포 출신 김성태
(50년생)가 도굴 단을 끌어 들인 것이다. 오뉴월 파리떼처럼 도굴 단이 모여 들었다.
두목은 백준흠(58년생)이란 서울의 보물 사냥꾼이다. 백준흠이 뒷배경으로 끌어 들인
세력이 당시의 노무현 청와대다. 나라에 최고 통치권자가 범죄단의 뒤를 봐주는 병풍이
된 것이다. 이리 되어 필자는 없는 죄를 뒤집어 썼다. 도굴단에게서 사기와 무고 등으로
고소당해 무려 44개월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필자의
노력이 역사의 굴레와 공권력 앞에서 무참이 짓밟힌 것이다.
문현동 지하어뢰공장과 보물의 존재 여부도 거의 모든 매스컴에 보도되며 세간의
관심을 끈적이 있다.SBS,KBS,MBC,YTN 등 공중파 TV에도 특집으로 방영되었지만 그때
마다 모조리 일회용으로 끝나버렸다. 마른 풀밭에 불길처럼 번져 나가야 될 텐데도
불길은 당장에 꺼져버렸다.‘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심지어 KBS에서는 한달 동안이나 각지를 돌아다니며 관련자들을 만나고 취재를
하여 제작을 마쳤다.방영일자까지 확정되었음에도 일주일을 앞두고 아무 설명도 없이
돌연 취소 되었다.무엇보다도 기가 막힌 사실은 발파와 지하 구조물 전문가들인 기술사,
대학교수 들이 일제 강점기에 구축한 동굴이란 일치된 증언과 감정을 했는데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배척 당했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높은 곳에서 압력이 들어 오는데
밑에서 이길 장사가 대한민국에는 없었다.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 지금껏 계속
되고 있는 가장 큰이유다.
국가 공권력이 동원되어 어뢰공장의 진실을 숨기는데 급급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담된 ‘금 도굴 사건’이 바로 문현동 지하어뢰공장의 진실이다.
노무현은 비명횡사 했다. 이제 그 책임은 참여정부에 2인자로서 문현동을 조작,왜곡,
은폐한 사령탑. 문재인이 대신 짊어져야 된다. 진실은 아무리 숨기고 죽이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살아난다고 하였다.
노무현재단을 만든 자금의 출처를 철저히 캐내야 된다. 그러면 저절로 문현동 금
도굴사건의 실체가 밝혀질 것이다. 문재인에게 요구한다. 노무현 재단의 자금 출처를
밝혀라.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이 열세군데 후보경선에서 계속1등을 하였다. 돈을
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삼척동자도 다 알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블랙 머니’는 어디서 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덮은채 우리는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문현동의 진실을 찾아냄
으로서 정의가 대한민국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시급한것이다.
맺는말
이 글을 보신 분들께 호소합니다. 필자가 여기에 기술한 내용에 대한 모든 증거는 아래
카페에 포함되어 있으며 눈꼽만큼의 허위 사실도 없음을 밝힙니다. 또한 국민이 원해
서 언제든지 불러만준다면 토론의 장이든 법의 심판장, 역사의 심판장,청문회등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동북아에서의 일본,중국,미국,한국 등이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의 사실규명과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조선청년 1,000명의 원혼을 위로하는
일이 시급합니다,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아직 정의가 살아있음을 인정 하신다면
이 사실을 주변의 모든 친지,동료들에게 알려 주십시요.국가적으로 공론화시켜 정말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가를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의 손으로 밝혀내 주시기를 비통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문현동 지하어뢰공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도 확보되어
있습니다. cafe.naver.com/mhdjs
한풀이의 글이 아닙니다. 지나간 역사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꽃 같은 조선 청년들의
원통함을 풀고 비틀어진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한 개인의 피맺힌 외침입니다.
바르지 못한 정권의 부도덕함으로 인하여 발생한 비극입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정의와 양심을 기대합니다.
이 시대의 뒤틀린 업청난 사건을 국민에게 직접 판결을 받고자 하는 비장한 심정으로
올리는 글임을 말씀드립니다.
문현동 금도굴 사건에 대한 개요
2차 대전 막바지, 패전이 짙어가던 1945년 5월.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점령하고 있던 각국
일본군 사령부에 일제히 명령이 하달된다. 전후 일본을 재건하고,내일의 일본을
기약하기위해 아시아 각국의 보물을 약탈하라는 일명 ‘긴노유리(黃金百合)’ 작전이다.
이에 중국방면군사령부는 각 지역에서 금과 국보급 문화재들을 싹쓸이하여 대련
항에서 부산항으로 보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계획한데로만 움직여주지 않았다.
일본군 중좌 미하라도시오(三原敏雄)는 일본인의 양자였던 조선인 최종욱에게
보물지도와 함께 약탈작전인‘ 긴노유리(黃金百合)’의 종착지를 가르쳐 주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 이였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이발사였던 박수웅에 의해 부산
문현동에서 본격적으로 보물 탐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박수웅은 세 명의 인부들과
함께 십여 년에 걸쳐 지하 수평 굴을 파 나갔다. 일제가 만들어놓은 지하어뢰공장을
관통시켜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다.그러나 보물 찾는 작업은 기약이 없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 이리하여 박수웅은 결국 실패를 거듭한 끝에 포기해
버렸다.그 뒤를 이어 다큐 작가 정충제(필자)가 이 일에 뛰어들었다.
필자의 집념은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2002년 3월2일. 지하16m 아래에 숨어있던
일제어뢰공장의 한 가닥인 수평 굴의 천정이 직경 60cm수직구로 관통되었다. 지상과
연결된것이다.이리 되기까지는 결정적으로 지하어뢰공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실체를
증명했던 일이 있었다. 미국에서 직접 제작 공수해온 최첨단 탐사장비의 덕택이
그것이었다. 이 사건은 직 간접적으로 미국의 CIA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일본군 대본영이 ‘긴노유리작전’을 실제로 지시했다는 지령문도 CIA가 미국방성
문서보관실에서 찾아낸적이있다. 이런 사실은 미 CIA극동 담당책임자였던
리챠드 롤리스와 필자와의 계약서에 잘 나타나 있다.
관통시킨 수직구 아래 수평굴속은 물에 잠겨 있었다. 수중카메라에 찍힌 영상에는
분명히 일제가 숨겨놓은 이등충(伊藤忠). 세 글자가 찍힌 황토색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마대 속에 든 것은 모두 ‘금편’이었다. 그때 필자가 본 금의 양을
필자는 천 톤 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변조된 굴속에 공간을 확인하고서 그렇게 추정
한 것이다.(참고로 금 1톤의 부피는 가로,세로,높이가 각 1자(尺)씩이다) 이 막대한 금과
함께 우리 대한민국 역사의 지울 수 없는 상처도 함께 발견되게 된다.
차가운 물속에 잠겨있는 거대한 어뢰공장의 지하공간 속에는 천구의 유골이 있었다.
진해 해군부 소속으로 징용영장을 받고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일제가 산채로 생매장
시킨 유골이었던 것이다. 끌려온 징용자들은 문현동 지하에서 두더지처럼 날마다
땅속을 팠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그리운 부모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땅굴 파는 일에 시달리던 이청년들을
일제는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 이들을 살려 보냈다간 그들이 목적했던 긴노
유리 작전이 모두 수포가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보물을 일본까지 직접 가져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이미 1943년부터 미 해군이 현해탄을 막고 있었기에 일본으로 가져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아무도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는 문현동
어뢰공장을 긴노유리 작전의 마지막 종착지로 선택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체 천명의
조선청년들은 햇빛도 통하지 않는 이 저주받은 지하동굴 속에서 산채로 생매장 당해
죽어 가야만 했다.잔인한 일본제국주의에 제물(祭物)이 된것이다.
스물 한 살부터 스물 다섯 살까지의 꽃다운 나이에 단지 식민지 땅에서 태어났다는
죄하나로 생매장을 당한 원혼들이다. 이제라도 늦지않다.햇볕 속으로 끌어 올리고
유골을 수습해야 한다. 지금도 성 노예 할머니들을 인정하지 않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는 일본을 불러 천명 조선청년들의 유골 앞에 무릎꿇리고 묻혀진 역사의 부끄러운
진실을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 역사의 진실 앞에 반성하라고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문현동 사건을 공론화 시켜야 하는 이유이다.이땅에 두발 디디고 사는
국민 한 명 한 명의 소명이며 의무인 것이다.
역사는 이 엄청난 사실을 뒤로 한 채 흘렀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질 이 사건은
우리의 현대사 만큼이나 왜곡되게 빗나가고 말았다. 필자는 이 역사적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그리고 엄청난 양의 금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쓰여 질 것이라는 포부로
십여년간이나 죽기살기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필자의 노력은 몇몇의 도둑떼와
국가 권력 앞에서 맥도 못추고 밟히고 부서졌다.
필자는 최초 발견자임에도 불구하고 배신을 당했다. 필자의 조수 삼천포 출신 김성태
(50년생)가 도굴 단을 끌어 들인 것이다. 오뉴월 파리떼처럼 도굴 단이 모여 들었다.
두목은 백준흠(58년생)이란 서울의 보물 사냥꾼이다. 백준흠이 뒷배경으로 끌어 들인
세력이 당시의 노무현 청와대다. 나라에 최고 통치권자가 범죄단의 뒤를 봐주는 병풍이
된 것이다. 이리 되어 필자는 없는 죄를 뒤집어 썼다. 도굴단에게서 사기와 무고 등으로
고소당해 무려 44개월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필자의
노력이 역사의 굴레와 공권력 앞에서 무참이 짓밟힌 것이다.
문현동 지하어뢰공장과 보물의 존재 여부도 거의 모든 매스컴에 보도되며 세간의
관심을 끈적이 있다.SBS,KBS,MBC,YTN 등 공중파 TV에도 특집으로 방영되었지만 그때
마다 모조리 일회용으로 끝나버렸다. 마른 풀밭에 불길처럼 번져 나가야 될 텐데도
불길은 당장에 꺼져버렸다.‘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고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었다.심지어 KBS에서는 한달 동안이나 각지를 돌아다니며 관련자들을 만나고 취재를
하여 제작을 마쳤다.방영일자까지 확정되었음에도 일주일을 앞두고 아무 설명도 없이
돌연 취소 되었다.무엇보다도 기가 막힌 사실은 발파와 지하 구조물 전문가들인 기술사,
대학교수 들이 일제 강점기에 구축한 동굴이란 일치된 증언과 감정을 했는데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배척 당했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높은 곳에서 압력이 들어 오는데
밑에서 이길 장사가 대한민국에는 없었다.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 지금껏 계속
되고 있는 가장 큰이유다.
국가 공권력이 동원되어 어뢰공장의 진실을 숨기는데 급급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담된 ‘금 도굴 사건’이 바로 문현동 지하어뢰공장의 진실이다.
노무현은 비명횡사 했다. 이제 그 책임은 참여정부에 2인자로서 문현동을 조작,왜곡,
은폐한 사령탑. 문재인이 대신 짊어져야 된다. 진실은 아무리 숨기고 죽이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살아난다고 하였다.
노무현재단을 만든 자금의 출처를 철저히 캐내야 된다. 그러면 저절로 문현동 금
도굴사건의 실체가 밝혀질 것이다. 문재인에게 요구한다. 노무현 재단의 자금 출처를
밝혀라.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이 열세군데 후보경선에서 계속1등을 하였다. 돈을
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임을 삼척동자도 다 알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블랙 머니’는 어디서 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덮은채 우리는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문현동의 진실을 찾아냄
으로서 정의가 대한민국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시급한것이다.
맺는말
이 글을 보신 분들께 호소합니다. 필자가 여기에 기술한 내용에 대한 모든 증거는 아래
카페에 포함되어 있으며 눈꼽만큼의 허위 사실도 없음을 밝힙니다. 또한 국민이 원해
서 언제든지 불러만준다면 토론의 장이든 법의 심판장, 역사의 심판장,청문회등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동북아에서의 일본,중국,미국,한국 등이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의 사실규명과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조선청년 1,000명의 원혼을 위로하는
일이 시급합니다,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아직 정의가 살아있음을 인정 하신다면
이 사실을 주변의 모든 친지,동료들에게 알려 주십시요.국가적으로 공론화시켜 정말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가를 5천만 대한민국 국민의 손으로 밝혀내 주시기를 비통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문현동 지하어뢰공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도 확보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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