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총격사건 일어난 나가노현에서 과거에도 총격전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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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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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70년대에도 나가노현에서 총격사건이 있었음. 1972년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일본 좌익 테러단체인 적군파가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카루이자와 정에 위치한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한 사건임. 범인들은 5명으로 이전에 벌어진 산악 베이스 사건의 가해자들 중 일부인데 내분으로 같은 조직원 12명을 살해하면서 경찰에 쫓기다가 아사마 산장으로 도피하게 된 것임. 이때 산장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음.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무려 280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음.
-문제의 산장
여담으로 이때 진압하러 온 경찰들이 닛신 컵누들을 먹는 장면도 TV로 생중계 되면서 그동안 일본인들에게 외면받던 컵라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
-범인들의 모습
범인들은 체포 후 기소되었고 주범인 사카구치 히로시(坂口弘)는 사형 확정, 요시노 마사쿠니(吉野雅邦)는 무기징역, 가토 형제는 형인 미치노리(加藤倫教)는 13년형을 선고받고 체포당시 16세였던 동생인 모토히사(加藤元久)는 소년원 송치로 마무리 되었어. 가토형제는 이후 전향한뒤 자민당에 입당했다고해. 반도 쿠니오(坂東國男)는 1975년 적군파와 일본정부의 초법적 거래로 해외로 도피하는데 성공했어.
-일본 경시청이 배포한 적군파 잔당들의 몽타주. 첫번째 남자가 반도 쿠니오(坂東國男). 요즘 일본에서는 적군파의 존재를 모르는 세대가 많아졌다고 한다.
1975년 8월 적군파가 쿠알라룸푸르에 위치한 미국대사관과 스웨덴대사관을 습격해 인질극을 벌이며 복역중이던 대원 5명을 석방하라고 했고 일본정부가 수용했는데 거기에 반도 쿠니오가 포함되어 있었던거지. 덕분에 반도 쿠니오는 국제수배중임에도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고 재판이 끝나지 않은걸로 간주되어 사카구치 히로시의 사형 역시 집행되지 않았어. 사카구치 히로시는 요시노 마사쿠니랑 계속 복역중이라고해.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 1년전,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고기
일본의 좌익세력은 이 아사마 산장사건을 기점으로 세가 약해지기 시작했어. 적군파는 이 사건으로 사실상 궤멸되어 일본에서 활동할 수 없게되었고 중동으로 건너가 아랍의 군사조직들과 손을 잡고 국제테러를 벌이기 시작했어. 석방되자마자 적군파에 합류한 반도 쿠니오는 다른 적군파 조직원 4명과 1977년 9월 28일에는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을 일으켜 600만 달러와 6명의 적군파 회원의 석방을 요구하며 118명의 인질과 교환하는데 성공했어.
적군파가 해외에서 일으킨 국제테러는 규모가 큰 사건들도 많지만 주제랑 멀어지니 생략하도록 할게. 어쨋든 일본밖에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던 적군파는 90년대 공산권의 붕괴로 더이상 외부세력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약해졌고 2001년 최고지도자가 옥중에서 공식적으로 해산선언을 했어. 일부 조직원들이 해산선언은 무효라며 적군파가 건재하다고 주장했지만 멤버들 또한 모두 고령이라 더이상 실질적인 활동은 못하고 있어.
-20년형을 선고받은 일본적군의 최고지도자 시게노부 후사코(70)가 2012년 12월 옥중 출간한 저서
60년대와 70년대는 일본에서 공산당이 가장 강력하던 시기였고 일본 시위문화는 우리나라보다 더 폭력적이였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 시절에 좌익들이 많은 사고를 쳤기때문에 반좌익 정서, 시위문화에 대한 혐오가 강해져서 자민당의 55년 체제 같은 지금의 우경화된 일본사회가 만들어진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