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대만 지식인에게 비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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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허우성은 일본 유학생 신분으로 추측되는 인물로서
1926년 7월 초부터 9월 중순까지 약 2개월 넘게 조선에 머물렀으며,
1926년 11월에 『대만민보(台灣民報)』 제132호에 발표한 「조선유람 소감(遊朝鮮所感)」이라는 글을 발표하였음.
셰춘무(謝春木)는 천허우성 보다 2년 전에 조선을 방문하였음.
당시에는 대만인이 여권을 발급받아 출국하는데 많은 심사와 금전적 비용이 들어갔고,
조선은 3.1 운동 직후라서 상당히 감시가 엄격했기 때문에, 대만인이 조선을 방문한 것은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① 조선인의 백의
천허우성은 백의를 입은 조선인에게서 “문명인으로서의 기개”18)가 느껴진다고 서술하였고,
셰춘무는 “긴 백의를 바람에 휘날리며 챙이 넓은 갓을 쓰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모습은 실로 평화롭고 우아하다.”19)라고 하면서,
“일본인이 이러한 모습을 왜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20)고 서술했다. 일본인은 백의를 입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셰춘무는 “일본인은 과거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젊고 활기찬 청년들을 무서워하고 있다.”라고 하며,
일본인이 조선의 청년들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 바 있다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천허우성과 셰춘무는 일본 사회에 만연되어있던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지만,
예룽중이 지적한 바와 같이 “3․1 운동은 도쿄에 있는 대만유학생들을 자극, 고무했다.”27)처럼 대만 지식인들은 당시
조선 민중이 일본에 대한 대규모 비무장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대부분 인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문명인으로서의 기개’라는 천허우성의 백의에 대한 의견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저항을 기억하고 대만 지식인으로서 적극적인 호응을 나타낸 것이다.
② 조선의 교육·문화 수준
천허우성은 조선의 교육 기관이 대체로 대만보다 훌륭하고, 문화적으로 발전했으며,
조선은 한글을 사용하고 있어서, 문어 보급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서술함.
“조선교육 기관은 대만보다 상당히 완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대학 전문학교, 고등 보통학교 등도 대만보다 많고,
사립고보, 여고보 및 보통학교 등 조선인이 경영하는 학교도 적지 않다.
또한 신문잡지 기관도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하지만 대만은 아직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최근 조선인은 한자를 잘 쓰지 않고, 간단한 조선어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어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노인네와 어린 아이도 신문이나 잡지를 쉽게 읽고 쓸 수 있다.
이에 비해 대만은 한자가 너무 어렵고 공부하기도 힘들어 교육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천허우성은 “일본이 오늘날 문화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일본한자가 쉽고, 언문일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29)라고 하면서
대만은 “글자를 모르지만 구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고전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을
마치 학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구사상은 빨리 깨뜨려야 한다.
나는 우리 대만 동포가 각지에 백화자보급회(白話字普及會)를 설치하여,
백화문을 배우고, 널리 보급하여 대만의 문화를 향상시켜야”30)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만의 언어 특성상, 복건성과 광동성 출신의 중국인이 정착한 뒤,
민남어도 아니고 광동어도 아닌 혼합된 형태의 ‘대만어’가 쓰이고 있었고,
이러한 방언 현상 때문에 "음은 있으나 문자가 없는 것"이 많아서,
중국 본토의 백화문 이상으로 문자 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천허우성은 백화자를 보급해야, 조선처럼 문화를 향상시키고, 교육 수준을 높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고 - 일제강점기 대만 지식인에게 비친 조선 (kci.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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