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지원병 제도 조선 vs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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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조선지원병 통계
1938년도에는 400명 모집에 약 2,900명이 지원하였다.
1939년도에는 600명 모집에 약 12,300명이 지원하였다.
1940년도에는 3,000명 모집에 약 84,400명이 지원하였다.
1941년도에는 3,000명 모집에 약 144,700명이 지원하였다.
1942년도에는 4,500명 모집에 약 254,300명이 지원하였다.
1943년도에는 5,330명 모집에 약 303,400명이 지원하였다.
대만지원병 통계
일제의 입장에서 지원자의 많고 적음은 대만사회의 황민화를 가늠하는 참고 지표가 될 수 있었다.
실제 군인이 되는 것을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
대만 청년들의 지원 열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1942년 1차 모집에 약 42만 여 명이, 1943년 2차 모집에는 60여 만 명이 지원하였는데,
2차 모집 때에는 香港ㆍ廣東ㆍ廈門에 거주하던 대만인 천여 명도 지원하였다.104)
인구는 대만보다 조선이 4배는 많은데,
지원병은 대만이 조선의 2배 쯤 됨.
일제 징병 대만 21만, 한국은 2만
중일전쟁 당시 약 21만명의 대만인들이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군과 싸웠던 반면 한국은 1938년에서 1943년 사이 징집된 병력이 약 2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이 대만 인구의 4배 정도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차이였다. 조선인의 경우 오히려 약 8만명의 병력이 중국 국민당군과 공산당 팔로군 또는 조선 독립군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운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에 징집된 조선인의 경우 당시 일본군 고위층에서는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있을 정도였다. 1942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학도병 제도를 시행했던 당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1880~1950)는 그의 일기에서 “조선 출신 병사들이 전선에서 영국이나 미국과 협조하여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눌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 청년들만 죽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들만 늘어나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대만은 왜 일본에게 호의적일까? < 문화/생활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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