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日과 혐한이 격돌해도 상관없다, 시정잡배만 아니라면 日本으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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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을 빠져나와 견문을 넓히고 다양한 관점을 체득하고 넓은 세계를 바로 볼 수 있을 때 개구리는 사색의 사람이 된다.
사색은 문명을 창조한다. 인간 세계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여행에는 자격이 없다. 아래 누군가가 고졸, 지잡대 출신 운운하면서 무식한 놈은 여행 가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만,(아, 물론 그분의 말마따나 공부하고 소양을 쌓아 떠나면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세계란 아는 만큼 보이니 그 점은 일정 정도 동의한다. 다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떠나서 보고 느끼고 다시 공부하고 관점을 축적시키면 된다) 아서라.^^ 무식할수록 더욱 떠나야 한다.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더욱이 세계에서 독보적인 문명을 이룩한 日本이 한반도 옆에 있다.
눈부신 문명을 접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이것을 활용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문명 속에서 어우러져 살면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DNA에 상관없이,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인(歌人)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활짝 핀 꽃밭 앞에서 벚꽃이 눈앞에 있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 정경을 즐길 수 있는 심미안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인(歌人)이다!^^
가인은 시정잡배와 다르다. 술 처먹고 헤롱헤롱거리면서 찜부럭 부리는 인간이 사색할 수 있을까? 꽃을 즐길 수 있을까? 시정잡배에겐 증오나 탐욕만 도사릴 따름이다.
증오에 사로잡힌 극단의 부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가인에겐 증오나 탐욕이 없다. 가인의 정신세계는 고요와 평온이 보장된 아름다움이다. 하여 그 순간 가인의 와카는 투명한 보석 같은 햇살이 되어 벚꽃에 안긴다.
<멀리서 바라보니 버드나무 벚꽃 서로 어우러져
미야코都는 마치 봄날의 비단 같구나>
이렇게 누구든지 눈부신 日本의 새봄을 극명히 표현한 와카를 읊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벚꽃이 지천으로 피는 봄이면, 아니 사계절 내내 日本은 경쾌하고 부드러운 여행의 바람이 여인의 손길처럼 오르내린다.^^
하면, 오묘한 그 손길을 실감하고 싶다면, 속옷 몇 벌 챙겨 일단 가볍게 떠나고 볼 일이다. 그러면 당신도 소에키 법사처럼 봄날의 비단 같은 미야코를 오롯이 느끼기 마련이다.
눈부신 日本은 이미 에도시대부터 여행의 제반 시설이 완벽히 구비되어 있었다. 바로 ‘참근교대’라는 제도의 덕분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각 번의 번주들에게 1년 걸러 에도에서 근무하게 만들었던 것인데, 사실상 다이묘들을 막부의 통솔하에 두려는 정책으로 인해 전국 각지의 번에서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1년 걸러 에도로 상경할 수밖에 없었다. 응당 그 과정의 도로가 전국적으로 철저히 정비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당연히 그들을 수용하려는 여관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예컨대 가고시마의 사쓰마 번이 에도까지 가려면 대략 40여 일이 걸리니 그들 모두가 길거리에서 노숙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여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눈부신 日本을 여행하는 이들 중에 ‘료칸’에서 숙박하는 이들도 많을 텐데^^ 종업원들의 접대문화가 사실 이때부터 정착되었던 셈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그리하여 일반 민중도 이 제반 시설을 1600년대 후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하더니, 1700년대에 들어서서는 그야말로 유행처럼 성행하기 시작했다. 화폐가 뜨겁게 유통되는 경제구조에다가 치안이 안정적이고 교통로가 발달되었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일반 민중들은 신사참배가 주목적이었다. 미에현에 있는 이세신궁이 그 중의 하나였는데, 민중들은 계를 조직하여 여행경비를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규모가 큰 참배단이 1650년에 생겼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민중들의 여행은 1830년 486만명에 이르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당시의 인구가 3천만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니, 민중을 위한 여행가이드북도 출간되기에 이르렀고, 그 효시가 명승지 관광을 소개한 <에도스즈메江戶雀>라는 책이었다. 1677년에 출간되었다.(스즈메가 한자로 읽으면 참새 작인데 수다쟁이란 뜻이다. 재미있다^^)
아무튼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日本人들의 여행은 지나나 이조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열풍처럼 강렬하고 뜨거웠다.
여행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진국>이란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눈부신 日本의 치안은 세계에서 가장 안정되어 있다. 전철과 버스 등 교통로도 더할 나위없이 발달되어 있다. 거기에다 지천에 먹을거리와 명승 그리고 온천이 넘친다. 여행객들에겐 참으로 좋은 조건이다. 벚꽃을 바라보다 그 아려한 정조에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속옷만 챙기고 훌쩍 떠나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얘기다. 혼자라도 상관없다.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당신에겐 외로움이란 말은 그저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혹시 아는가. 열차에 앉아 있는 당신의 옆자리에 눈부신 미인이 동석하게 될지. 그럴 때 당신은 느긋하게 고사기(古事記)의 하야부사와케노미코(速總別王)처럼 이렇게 노래 부르면 어떨지^^
<비록 구하하시 산이 험하여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조금도 험하게 느껴지지 않는구나>
추신> 젊은이라면 학업이나 직장에 다녀도 수시로 짬을 내어 여행하면 좋다. 견문도 넓힐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현해탄 너머 눈부신 日本문명이 있고 태평양 너머 米國이 있다. 유럽도 저기에^^ 있다. 세계는 넓다. 17세기의 日本人처럼 계를 조직해서라도 여행경비를 만들어라. 그리하여 세계를 보고 와라. 우물 안 개구리는 세계를 보지 못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첩경 중의 하나는 견문을 넓히는 일이다. 쇄국을 고집했던 도쿠가와 막부도 이 점을 부인하진 않았다. 그래서 네덜란드와 통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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