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분류
김구의 치하포 사건은 강도살인
작성자 정보
- ㅇㅇ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17 조회
본문
http://www.mediagaon.or.kr/jsp/search/SearchGoDirMain.jsp?code=DLD&year=1896&month=09&day=22
1896년 9월 22일 2면 독립신문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0922u00_02.pdf
9월 16일 인천 감리 이재정씨가 법부에 보고하였는데,
해주 김창수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수 토전양량(스치다 조스케)을 때려죽여 강물속에 던지고 환도와 은전 많이 빼앗기로
잡아서 공초를 받아올리니 저를 재판하여 달라고 하였더라.
1896년 11월 7일 2면 독립신문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1107u00_02.pdf
그전 인천재판소에서 잡은 강도 김창수는 일상 토전양량(일본 상인 스치다 조스케)를 때려죽여 강에 던지고 재물을 탈취하였으니 교(교수형)에 처하고...
김구는 해주 출신으로 당시 이름은 김창수. 그에게 살해당한 스치다는 상인인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050
5) [일본인 토전양량의 피살사건과 범인체포요구 건]
공문제20호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천령사의 보고에 따르면, 장기현 평민 토전양량이라는 자가 조선인 1명(평안도 룡강 거주 림학길, 20세)을 데리고 황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진남포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도중에 황주 십이포에서 한국 배 1척을 세내어 대동강을 내려가다 3월 8일 밤 치하포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9일 오전 3시경 그 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 곳 숙박업자 리화보 집에 갔습니다. 다시 귀선하려 할 때에, 그 집 뜰 앞에서 그 여인숙에서 숙박한 한인 4, 5명에게 타살되었습니다. 고용된 한인 림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였지만 간신히 위험을 피하여 같은 달 12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평원경부에게 위와 같은 사건 전말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평원 경부는 순사 2명과 순검 5명을 인솔, 같은 달 15일 사건 현장에 도착, 검사를 하려고 하였더니 여인숙 주인은 경부 등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고, 피해자의 시체는 벌써 강에 버려진 뒤라 검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인숙의 뜰 앞에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부 일행은 그곳 군 직원에게 엄하게 항의하였더니 그들이 가해 혐의가 있는 자 7명을 데리고 옴에, 조사해 보니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고 다만 이 사건을 들어서 알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토전양량의 남은 재산은 한전 10표와 행낭보따리 1개가 있는데, 한전 이표는 누군가 빼앗아 가고 나머지는 무사히 인천 영사관이 인수했다는 것입니다. 조사하건대 본건 피해 전말은 전기한 바와 같이 우리 영사의 보고에 따라서 사실이 명확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쉽게 수색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날짜를 미루지 말고 곧 평양 관찰사 및 해당 군수에게 엄중하게 훈령을 보내어 일정을 정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상응한 처분을 하시길 부탁드리며, 위와 같이 조회하오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896년 3월 31일
변리공사 소촌수태랑
외무대신 리완용 각하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130
제국민서조해에 관한 조선정부와의 교섭월일표
매약상 토전양량
계림장업단인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12r_0010_0090
1. 현재의 정황
계림장업단은 지난 1896년 5월 인천에서 조직되어 그해 8월에 이르러 지부를 경성, 부산, 원산에 설치하였음.
안타깝게도 그가 죽은뒤에 조직되었다.
당시 치하포 사건〔토전양량(土田讓亮) 격살건〕취조문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1&lm_sItemCode=002.000.000.000&lm_sSrchYear=&keyword
공훈전자사료관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2. 치하포 사건 때 죽은 스치다는 그냥 상인이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1300329119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13&officeId=00032&pageNo=19&printNo=16186&publishType=00010
스치다가 계림장업단이라고 주장하는 도진순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050
스치다가 죽은건 1896년 3월이고,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12r_0010_0090
계림장업단이 조직된건 1896년인데 정말 황당합니다
요약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길가면서 밥먹는 일본인을 국모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죽였는데 일본 군인이었다. 그래서 감옥에 갔지만 고종이 전화로 사형을 멈춰달라고 했다. 그래서 살아났다.
결정적으로 죽은 스치다는 군인이 아니라 상인이었다. 게다가 김구는 여럿이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돈을 빼앗았다. 그리고 심문에서 "일본인이 밥을 먼저 받아서 죽였다"라고 거짓말했다.
고종이 살려준것도 아니다. 1896년 당시에는 인천~서울 전화 연결이 없었다. (전화연결은 1898년)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 살았으며 결정적으로 고종이 살려준건 김구가 아니라 우범선(민비 암살 가담) 암살한 고영근이었다. 그러니까 김구는 거짓말을 한것이다.
1896년 9월 22일 2면 독립신문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0922u00_02.pdf
9월 16일 인천 감리 이재정씨가 법부에 보고하였는데,
해주 김창수가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장수 토전양량(스치다 조스케)을 때려죽여 강물속에 던지고 환도와 은전 많이 빼앗기로
잡아서 공초를 받아올리니 저를 재판하여 달라고 하였더라.
1896년 11월 7일 2면 독립신문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DLD/DLD18961107u00_02.pdf
그전 인천재판소에서 잡은 강도 김창수는 일상 토전양량(일본 상인 스치다 조스케)를 때려죽여 강에 던지고 재물을 탈취하였으니 교(교수형)에 처하고...
김구는 해주 출신으로 당시 이름은 김창수. 그에게 살해당한 스치다는 상인인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050
5) [일본인 토전양량의 피살사건과 범인체포요구 건]
공문제20호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천령사의 보고에 따르면, 장기현 평민 토전양량이라는 자가 조선인 1명(평안도 룡강 거주 림학길, 20세)을 데리고 황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진남포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도중에 황주 십이포에서 한국 배 1척을 세내어 대동강을 내려가다 3월 8일 밤 치하포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9일 오전 3시경 그 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 곳 숙박업자 리화보 집에 갔습니다. 다시 귀선하려 할 때에, 그 집 뜰 앞에서 그 여인숙에서 숙박한 한인 4, 5명에게 타살되었습니다. 고용된 한인 림도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였지만 간신히 위험을 피하여 같은 달 12일 밤 평양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평원경부에게 위와 같은 사건 전말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평원 경부는 순사 2명과 순검 5명을 인솔, 같은 달 15일 사건 현장에 도착, 검사를 하려고 하였더니 여인숙 주인은 경부 등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고, 피해자의 시체는 벌써 강에 버려진 뒤라 검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인숙의 뜰 앞에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부 일행은 그곳 군 직원에게 엄하게 항의하였더니 그들이 가해 혐의가 있는 자 7명을 데리고 옴에, 조사해 보니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고 다만 이 사건을 들어서 알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토전양량의 남은 재산은 한전 10표와 행낭보따리 1개가 있는데, 한전 이표는 누군가 빼앗아 가고 나머지는 무사히 인천 영사관이 인수했다는 것입니다. 조사하건대 본건 피해 전말은 전기한 바와 같이 우리 영사의 보고에 따라서 사실이 명확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쉽게 수색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날짜를 미루지 말고 곧 평양 관찰사 및 해당 군수에게 엄중하게 훈령을 보내어 일정을 정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상응한 처분을 하시길 부탁드리며, 위와 같이 조회하오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896년 3월 31일
변리공사 소촌수태랑
외무대신 리완용 각하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130
제국민서조해에 관한 조선정부와의 교섭월일표
매약상 토전양량
계림장업단인가?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12r_0010_0090
1. 현재의 정황
계림장업단은 지난 1896년 5월 인천에서 조직되어 그해 8월에 이르러 지부를 경성, 부산, 원산에 설치하였음.
안타깝게도 그가 죽은뒤에 조직되었다.
당시 치하포 사건〔토전양량(土田讓亮) 격살건〕취조문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jsp?lm_sHisCode=PV_DJ&lm_sBookCode=A011&lm_sItemCode=002.000.000.000&lm_sSrchYear=&keyword
공훈전자사료관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2. 치하포 사건 때 죽은 스치다는 그냥 상인이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1300329119001&ed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13&officeId=00032&pageNo=19&printNo=16186&publishType=00010
스치다가 계림장업단이라고 주장하는 도진순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09r_0010_0050
스치다가 죽은건 1896년 3월이고,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jh_012r_0010_0090
계림장업단이 조직된건 1896년인데 정말 황당합니다
요약
김구(당시 이름은 김창수)가 길가면서 밥먹는 일본인을 국모의 원수라고 생각하고 죽였는데 일본 군인이었다. 그래서 감옥에 갔지만 고종이 전화로 사형을 멈춰달라고 했다. 그래서 살아났다.
결정적으로 죽은 스치다는 군인이 아니라 상인이었다. 게다가 김구는 여럿이서 일본인을 살해하고 돈을 빼앗았다. 그리고 심문에서 "일본인이 밥을 먼저 받아서 죽였다"라고 거짓말했다.
고종이 살려준것도 아니다. 1896년 당시에는 인천~서울 전화 연결이 없었다. (전화연결은 1898년)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 살았으며 결정적으로 고종이 살려준건 김구가 아니라 우범선(민비 암살 가담) 암살한 고영근이었다. 그러니까 김구는 거짓말을 한것이다.
관련자료
댓글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