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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천황폐지론자 기타 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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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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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一輝 1883년 4월 3일생-1937년 8월 19일몰



본명은 키타 테루지로(北 輝次郎). 메이지 16년(1883년) 4월 3일 니가타현 사도군 료츠미나토정(현 사도시)의 양조업자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도 있을 뿐더러 부친은 정장을 지낸 인물로서 나름 지역 유지였다. 이런 주변부 지역 호족 출신성분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민권운동에 많이들 참여하는데, 키타의 부친과 숙부도 그 중 하나였고 키타는 그것을 보며 자랐다.


1901년 이 때 고토쿠 슈스이 등의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키타는 신문지상에 러일전쟁 찬성론, 국체론 비판 등 논문을 발표하다가, "국민 대 천황의 역사적 관찰"이라는 논문에서 "천황은 국민의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다"라고 썼다가 불경죄로 연중을 당했다.


남동생이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자 같은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 독학으로 사회과학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1906년 첫 단행본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간행했다. 이 책은 발간 5일만에 금서가 되었고 키타는 요시찰인으로 여겨져 경찰의 사찰대상이 되었다. 책이 판금되자 일본국내 개혁에 좌절한 키타는 국제개혁을 통한 국내개혁을 주장한 미야자키 토텐 등 대륙낭인들과 어울려 중국동맹회에 입당, 신해혁명에 투신한다. 이때 키타는 중국에 건너가 쑹자오런 등과 교류했는데, 그의 중국행은 흑룡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특파원 신분으로 흑룡회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1913년, 친구 쑹자오런이 상해 철도역에서 암살된다. 정황상 위안스카이가 범인이 확실했지만 키타는 쑨원이 범인인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선동하기 위해 신문에 쑨원을 암살 사주범으로 지목하는 기사를 썼다.


1921년 오카와가 세운 유존사에 합류하여 국가개조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유존사는 1923년 해산당하고 키타와 오카와는 사이가 벌어져 철천지원수가 되어 버린다. 키타는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발간, 의회를 통한 변혁에 한계가 뚜렷하니 군사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금서 처분을 당했으나 쇼와 유신을 추종하던 청년장교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30년대 들어서 일본이 국가총동원체제로 전환되어가면서 기타는 정치활동을 그만두고 종교(일련종)에 침잠한다. 자기 이름과 얼굴이 드러난 상황에서 찌라시 흔들기 같은 모험을 또 하기에는 시국이 너무 엄혹해져 있었다. 기타는 저택에 틀어박혀 법화경 낭송으로 세월을 보낸다. 1936년, 키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위 2.26 사건. 키타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상적 배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재판장은 기타가 무죄이고 죄가 있다 하더라도 방조죄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군 상층부의 압력을 받은 다른 판사들이 기타가 반란수괴라고 주장해 그것을 관철시켰다. 결국 1937년 8월 14일 니시다와 함께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5일 후인 8월 19일 형이 집행되었다. 함께 총살된 니시다가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부를까요"라고 묻자 키타는 거부했다.


키타는 분명히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로 표상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할 수는 없었다. 키타는 마르크스보다 플라톤의 사회조직론이 더 우수하다고 했고, 맹자는 동방의 플라톤이라고 했다.


키타의 일본 정치에 관한 구상은 1923년 발간한 『일본개조법안대강』에서 집대성된다. 키타는 "단일한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사회주의의 이상이 강제되는 전체주의를 도입하고자 했다. 키타는 천황이 일본 사회에서 누리는 특수한 지위, 신적 존재로서 무한한 권위는 가지고 있으나 실권은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 착안해 천황을 바로 그 역할을 맡을 존재로 낙점했다.


일단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천황을 장악하고, 천황의 권위를 이용해 메이지 헌법을 중지시킨다. 유산보수정당들을 쓸어버리고 민중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정당들로 의회를 급격히 재조직한다. 개조된 국회는 전략산업을 국유화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천황과 국민 사이를 막고 있는 화족과 궁내성 같은 "울타리"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고문원으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고문원의 고문은 천황을 알현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명망 있는 국민적 지도자들로 선출한다. 그리고 이런 내부적 개혁으로 강력해진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를 해방시킨다.


...는 것이 키타의 정견이었다. 이것을 "국가개조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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