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실체
작성자 정보
- ㅇㅇ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17 조회
본문
출처 : https://m.facebook.com/mauus.ks/posts/331488221040027
김좌진은 김구와 더불어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의 알파와 오메가이자, 항일의 업적에 빛나는 새벽별이시며,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상 그리 대단한 공적이 있던 사람은 아니다.
청산리 전투 이후 김좌진은 영 되는 일이 없더니, 운좋게 자유시 참변을 모면하고, 흩어진 무장대를 모아 1922년에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이때의 병력은 꼴랑 600여명이 전부였는데, 무엇보다 이들을 먹여살리고, 무기를 구입할 돈이 없었다.
1923년 하얼빈총영사의 기밀보고 88호를 보면, 이들은 거지꼴로 동녕 영안 밀산 지방에 숨어들어 조선인 농가에 흩어져 밥을 얻어먹고 있다고 한다. 양민들의 민폐가 막심하므로, 속히 이들을 구제하여 정업(正業)의 길로 인도하게 조치를 취해달라는게 보고의 요지.
1924년 3월 15일 간도총영사의 기밀보고 83호에는 더욱 열악해져 이들 대부분이 이탈하여 50명 정도가 잔존하고 있는데, 모두 더러운 지나복 또는 선인 복장을 한채 농민으로 가장하고 삼삼오오 분숙, 무위도식 중이라고 한다.
이들의 무장정도는 기존 20정의 권총과 3,000엔을 주고 추가 구입한 모젤식 자동권총 24정을 보유중이며, 평상시에는 민가에 은닉해두었다가, 모금하러 갈 때만 휴대하였다. (좋게 말하면 모금이 안되니까요)
이 시기에 일제는 양민들의 피해가 너무 크므로, 지역 유지들을 앞세워 김좌진의 귀순을 설득하는데, 김좌진은 남자로 의사를 결정하고, 대업에 몸 담은 이상 끝을 보겠다며, 거절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경규의 명언처럼 신념을 엉뚱하게 가지면 무서운 법, 그는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의 군령을 남발하여, 징집에 응하지 않거나, 요구한 군자금 상납에 응하지 않으면 언제든 조직의 쓴맛을 시전하였던 바, 화전민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고, 돈이 없으면 사람을 납치하거나 죽여서 인증샷을 남기는 일 따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방식이 북만주 조선인들의 민심을 크게 이반하였음은 당연지사일 뿐만 아니라, 일제보다 더 악랄한 악명을 떨쳤던 것인데, 만주의 선인들이라면 누구나 저 새끼 좀 문졌으면 하는 원성이 가득했다.
김좌진의 횡포에서 견디다 못한 빈주현 마을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직에서 탈퇴하고자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는데, 김좌진 일파 무장대원 25명이 대회장에 난입하여 주민 6명을 격살해버린 빈주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김좌진의 신민부는 민정파와 군정파로 완전 양분되고 만주지역에서 공공의 적이 되버린다.
빈주사건 피해자 가족들의 복수심에 편승한 공산주의 단체들이 보복을 천명하면서, 당시 공산주의 조직의 한 분파였던 화요파가 장첸급 닌자 박상실을 보내, 김좌진을 암살해버리게 된 것이다. 김좌진 암살사건은 단순히 혈기왕성한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거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의 음모로 도식화시키는 것은, 당시의 정세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좌진은 주변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내부적으로는 기호파, 함경도파, 영남파, 평안도파로 나뉘어 지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있었고, 1923년부터는 적기단과 나와바리 쟁투를 벌였다. 1928년에는 정의부와 또 데쓰매치를 벌이다, 액목지방 총관이 살해되기도 했다.
김좌진의 암살사건은 어찌보면 당시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이다. 독립운동가랍시고 맹목적으로 신화화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또하나의 왜곡이다
관련자료
댓글 0개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