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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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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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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상략 울진현 주변을 서술)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고,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중략 울릉도에 대한 서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울진현을 중심으로 해서 울진현 주변을 설명후 울진현에서 보이는 서로 멀지 않은 우산 무릉을 설명 이 두섬을 울릉도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방은 100리이다. 그리고 아래 김인우가 나오는데 김인우는 이미 우산도에 갔다온적이 있다. 갔다와서 뭐라고 보고했었을까? 아래 태종실록을 보자       태종실록   1-1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土産物)인 대죽(大竹)·수우피(水牛皮)·생저(生苧)·면자(綿子)·검박목(檢樸木)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 그 섬의 호수[戶]는 15구(口)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태풍(颱風)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1-2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육조(六曹)·대간(臺諫)에 명하여, 우산(于山)·무릉도(武陵島)의 주민[居民]을 쇄출(刷出)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武陵)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五穀)과 농기(農器)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主帥)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慰撫)하고 또 토공(土貢)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黃喜)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安置)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 저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搖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金麟雨)를 그대로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도로 우산(于山)·무릉(武陵) 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옷[衣]·갓[笠]과 목화(木靴)를 내려 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襲)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게 명하여 병선(兵船) 2척(隻)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 만호(水軍萬戶)와 천호(千戶) 중 유능한 자를 선간(選揀)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 김인우는 우산도에 사는 3명을 데려오면서 그 섬엔 86명이 살고 있다고 보고 3일후 김인우가 데려온 우산도에 사는 3人에게 태종이 옷을 내림 즉 이것만 봐도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도는 독도가 아님이 명백       그리고 아래 세종실록지리지를 계승한 동국여지승람을 보자           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ㆍ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 리라고 한다 . (중략 울릉도에 대해 서술 세종실록지리지와 똑같이 서술함)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안무사(按撫使)를 삼아서 돌아오게 하고 그 땅을 비워두었다. 인우의 말이, “토지가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다릿목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사의 크기는 됫박 만한데, 모두 물건이 다 이렇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위에 언급했다시피 동국여지승람을 계승한거임 계승하면서 오히려 울진에서 우산도 울릉도가 어떻게 보이는지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으며 그 뒤로 지방100리부터 물건이 다 이렇습니다. 이 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쓰인거 그대로 인용한거임 저런데 무슨 관측 시점이 다르다?  관측 시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는 타당한 근거따윈 없으며 우산도에 다녀온 김인우가 86명이 살았다고 보고했다고 다시한번 말함         저 두 기록을 울릉도에서 독도 보는걸로 해석했을경우 다음과 같은 모순이 발생함           1. 지방100리에 과연 독도가 들어갈까?     2.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포함해서 당시 고지도엔 우산도가 울릉도 서쪽 남쪽 북쪽에 그려져 있는걸 볼 수 있는데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는데 어디가 동쪽인지 모른다???     3.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는데 두섬은 일설에 한섬이다?             즉 숙종 이전까지 조선은 울릉도도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는 결론이 가능   울릉도도 제대로 모르는데 독도를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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