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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추리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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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지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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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셜록>의 한 장면(출처:야후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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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고전에 녹아들어 있는 천황의 시가들. 四民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천황의 시가들은 만세일계(万世一系)를 반추(反芻)시키며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지게 한다. 응당 만요슈가 국민총화의 거대한 알레고리(allegory)로 기능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日本人들에게 천황은 국민총화(国民総和)의 상징 그 이상일 수밖에 없다는 추리가 펼쳐지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즉, 천황은 유구한 역사를 함께 해 온 日本이란 공동체의 정수(精髄)로 구성원들의 인식에 뿌리 깊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면, 거리의 시민들이 봉건성에 함몰되었다는 추리와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小生의 추리가 가뿐히 놓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추리가 보다 진실에 근접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묻고 보니, 민망합니다만.^^」


그건 그렇고, NHK의 거리 인터뷰에는 금발의 외국인도 등장해 즐거운 기색으로 소감을 피력했는데 푸른 눈에 금발이라 그런지, 문득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로 개명한 영국 출신의 위대한 작가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도 생각났다. 천황에 대한 견해를 자신의 저작물에서 소박하게나마 밝힌 터라 그의 글을 통해서(사실)도 외국인 인식의 일단도 엿볼 수 있겠다.

그러면 라프카디오 헌의 소소(昭昭)한 견해를 들어보자.(출처는 『19세기 日本 속으로 들어가다』이다.) 그가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이시하라(石原)라는 제자와 나눈 대화다.


“선생님은 천장절(天長節) 때에 천황폐하의 사진에 인사를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이전 영어 선생님과는 다르더군요.”

“어떤 식으로 다르던가요?”

“이전 선생님은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하느님은 기독교의 신뿐이고, 비속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이 이외의 신을 섬긴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영국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영국 국민이라면 영국의 여왕폐하를 존경할 것입니다. 그분은 모자를 벗지 않고서는 여왕님의 사진을 모신 영국 영사의 사무실에 들어갈 순 없을 것입니다……중략…… 나는 학생이 천황폐하를 존경하고 국법을 따르며…… 조상신을 모시고 日本의 종교를 지켜나가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또 日本이나 폐하를 위해서도 그 선생님의 악의에 가득하고 저속한 말에 분노를 표시하는 것이 학생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도 채집(採集)해 보면, 문화상대주의(文化相對主義) 관점에 입각한 해석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어, 인터뷰에 흐뭇이 응한 금발 외국인의 마음 근저(根底)를 명탐정처럼 명쾌히 <추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즐거운 과정이다.

물론 여기서 빠뜨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관건은 하나의 <사실>에 접근해 나가는 <태도>다. 만에 하나, 일방의 관점으로만 어떤 사실을 획득했을 때는 그 뒤의 추리란 반드시 보잘것없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방의 관점에 의한 앎이란 필연코 상투적이고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피상적(皮相的) 앎 따위가 사물의 실체를 분별하는 실증(実証)의 안목을 구현시킬 리 만무하다.


당연히, 일방의 관점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협량(狭量)한 소견머리만 낳게 한다. 이를테면 日本에 태풍이나 홍수가 왔다는 인터넷 기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증오의 글들이 단연코 그러하다. 이웃의 자연재해를 고소해하거나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는 헤이트 스피치(háte spèech憎惡言說) 녀석들의 의식에는 단언컨대 ‘일방’만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일방의 관점은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버린다. 선과 악뿐이다. 허나 세계는 미안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헤이트 스피치 녀석들 정신차려!"


그래서 ‘<사실>(앎)’을 향한 자세는 지극히 입체적이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은 물론이고 타자를 오류 없이 통찰하기 위해선 내재적 접근이 어렵다면, 최소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이라도 끊임없이 견지(堅持)해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실증(実証)의 안목이 가능하다, 전후좌우로 다 살필 수 있는 태도, 그것만이 <입체적 앎-실증의 안목>을 구축시킨다.

더 나아가 ‘거시적’ 뿐만이 아니라 ‘미시적’으로도 <디테일하게> 하나의 사안에 대해 알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올바른 <추리>(견해)가 나올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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