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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잡배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하지 못할 日本人의 공동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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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지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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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日本人에 대해 몰상식하고 몰이해한 것들이 왕왕 하는 얘기가 있는데, “日本人들은 순종적이다” 전혀 아니다. 日本人들은 순종적이지 않다. 물론 그들이 순종적일 때는 ‘리더’가 명분이 있고 자신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믿음이 확실할 때만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따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얼음장처럼 차갑게 뒤돌아설 뿐이다.


예전 자민당이 1년에 한 번 꼴로 總理가 바뀌었을 때의 관건은 역시 지지율이었고, 민주당이 지금처럼 완전히 외면 받게 된 계기도 집권시 보여주었던 무능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는 ‘갑질’, 즉 칼자루는 민중이 쥐고 있다는 얘기다. 정치뿐만 아니다. 총체적으로도 그렇다.

이건 역사적으로 강력히 내려온 전통이다. 에도 막부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서열과 그에 따른 충을 강조하기 위해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은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다. 제발 좀 순종해라!^^


무슨 말이냐 하면, 에도 막부가 들어서기 전,(막부 이후에도 일어나긴 하지만) 중세에 빈발했던 ‘잇키’(一揆)가 바로 민중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게 했다는 얘기다. 잇키란 ‘일치단결’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잇키란 영주세력을 향해 농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저항한다는 것인데, 뭐^^ 이런 경우는 전 세계, 동서고금을 통틀어 어디에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례이다. 문제는 日本의 경우 좀 더 조직적이었고, 좀 더 집요했고, 타 세력과의 연대도 원활하게 해(불교의 사원세력^^)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한 경우가 많았다는 데에 있다. 예컨대 나라현에는 농민들이 잇키에서 승리하여 기념으로 만든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바로 마을 자치기구인 <소손>이라는 시스템 때문이었다. 엄격한 룰을 정하고 일치단결해 영주에게 저항했다. 대략 세 가지 방법이 대표적이었다.

고소(强訴), 죠산(逃散), 쓰치잇키(土一揆)가 그것이다. 쉽게 말해 마을 사람 <전원>이 영주의 거처로 몰려가 하소연하거나, 아예 <전원>이 마을 밖으로 탈출하거나, 혹은 <전원>이 무력봉기하는 것이다.

이거 당해낼 영주 없다. 상상해 보라, 어느날 아침 영주가 눈을 떠보니 모든 거주민이 깡그리 사라진 모습을^^ 오죽했으면 천하의 다이라노 기요모리나 시라카와 법황이 골머리를 앓았겠으며, 천하의 다이코 히데요시는 아예 농민들에게 도금 몰수령까지 내렸을까^^


전원이 일치단결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와 마을 주민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 하면, 엄격한 룰을 지도자가 먼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전원 단결이란 과제는 결단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日本은 예전부터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리더를 믿을 수 있었기에 대중은 철썩같이 뭉칠 수 있었다. 지도자와 대중이 하나가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위업이냐 하면 조선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리더가 솔선수범하지 않는다. 대중은 리더를 불신한다. 단적으로 임진전쟁 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리더를 향해 대중은 경복궁을 불태우는 걸로 화답했다.


현대사회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도산하면 리더들이 종업원들의 재취직을 호소하며 도게자 하는 경우를 日本처럼 한국의 리더들에게 본 적이 있었나 말이다! 일치단결인 잇키는 그저 나오는 게 아니란 얘기다. 아무튼 소손의 우두머리는 ‘지자무라이’라고 하는데, 하급사무라이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나중에 메이지 유신 주력 세력 중의 하나가 된다는 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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