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실록으로 보는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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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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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10월 10일, 북병사가 북방을 지키던 군인들에 대해 상소하였다. 그 내용인즉슨 이경록, 이순신이 군기를 그르쳐 아군 10명이 죽고 106명의 인질이 끌려갔다는것이다. 이에 비변사에서 논의한 뒤 "전쟁에서 패배했을때와 다르다"며 병사들과 장교들로 하여금 곤장을 친 뒤 백의종군 시킨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왕조실록만 봤을때 추리해보자면, 중과부적이었는지 아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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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3일, 이순신은 수병(舟師, 조선시대때는 주사라고 하였음)을 동원해 다른 행정구역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척을 격파하고 일본군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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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21일, 동래(東萊, 부산 오른쪽 위의 지역)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였다.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 여기서는 도망쳤다는 뜻)가 서로(西路, 서쪽 길)로 도망치자, 황해도 이남부터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이때, 경상 우수사 원균과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서로의 병선을 합쳐 일본군을 물리쳤다.


5월 6일, 적선 30여 척이 항구에 정박중이었고 나머지 일본병사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병선 80여척을 끌고 나타나자 일본군이 그에 호응해 배를 타고 나와 싸웠으나 적선 26척을 불사르는 등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 큰 전쟁)을 하기로 다른 장수들과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서쪽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 또한 도망쳐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흩어졌다.

5월 29일에 이순신과 원균이 다시 노량(露梁, 여수 오른쪽 위의 지역으로 한반도 아래끝의 중앙부분)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근처에 있는 어떤 산에 일본군 1백여 명이 진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썰물때라 큰 배가 바다로 나갈수 없게되었다.


이에 이순신이,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병선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일본군들이 과연 작은 배들을 타고서 추격해 왔다.(* 큰 배는 썰물때라 추격에 동참하지 못함)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들을 쏘아대 일본 병선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6월 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고 있었다. 이에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와 부딪혀 부순 뒤, 적장을 보고 활을 쏘니 적장이 거꾸러졌다.


6월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여 사기가 올라갔다

6월 5일 조선 수군들이 외양(外洋, 부산시 가덕도의 아래쪽 항구)으로 나갔는데 적선이 고성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적선을 발견해 바로 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진치고 있었다.


이전때와 마찬가지로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이에 모든 조선 수군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조선군이 승세를 타 적선에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일본군의 머리 210급(級)을 베었으며 이 외에도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6월 6일에 남아있는 일본군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6월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7월 6일에 이순신이 이억기와 노량에서 병선을 합쳤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부서진 배)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7월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일본병사들이 아군이 강해보이는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도망쳤다. 이에 조선 수군들이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미리 진을 치고 있었는데 위치가 좁은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는척 퇴각하는척 하면서 그들을 조금씩 유인하니, 오히려 반대로 일본군들이 오히려 한산(閑山) 앞바다까지 유인되었다

아군이 학익진(鶴翼陣)으로 진을 친 뒤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였다. 이에 추격하며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7월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었다. 지역이 좁았고 물고기처럼 진을 치고 있었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일본군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선 군사들이 가만히 정지중인 일본군들을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적의 머리를 벤 것이 2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승전으로 인해 엄청나게 주목을 받게되었으며 자주 언급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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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28일, 거제 현령 김준인은 왜란 당시 성을 가장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던 충직한 신하였었는데 순찰사 김수가 공무로 불러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군사와 백성이 도망쳐버려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이에 그 근처에 있는 남해 현령 기효근이 이순신에게 "거제는 남해와 가까운데, 이곳에는 군량이 많기 때문에 만약 적이 이곳을 탈취하면 그것을 기반으로 호남을 침범하려 할것이다"라고 통보하였다. 이순신은 호남의 수군 기지를 지키기 위해 남해의 군량과 무기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이후 기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해를 침범하지 않았다. 아마 그 이전에 막혔거나 아니면 그 길로 쭉 북진을 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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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9일, 이억기와 원균과 이순신 등이 적선 39척을 쳐부수었다. 적병을 벤것이 9급뿐인것을 봤을때 정박중인 배를 기습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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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4월 18일, 무수한 일본의 군선이 다시 조선에 오고 있을때 그 적선들을 모두 공격하여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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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5월 27일, 조정에서 조선군과 중국군이 같이 진격하는것에 대해 의논한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이끄는 수병들은 해항에 있어 합세하지 못했다고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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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5월 29일, 일본군선이 계속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있는데


이순신과 이억기 등이 "적이 유인되지 않아 싸울수 없다"라고 장계를 올렸다고 한다


위의 한산도, 당포 등에서 승전한것 모두 유인을 한 다음에 이긴것들이었는데 그 이후 일본군이 유인전술에 넘어가지 않게되면서 활약을 약 1년 동안 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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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0월의 기사를 보면 조금 이상한 내용이 있다. 분명 그 해의 1월에는 이억기 1만명, 이순신 5천명 등의 수군이 있다고 나와있는데


같은해 10월의 기사를 보면 이순신의 군사는 1천여명이고 원균의 군사는 6백여명이라고 나와있고, 또 굶주리고 있다고도 나와있다


초반에 크게 먹혔던 유인전술이 더이상 안먹히자 게릴라전으로 바꿨는데 어느날 패배라도 한것일까? 아니면 기근과 굶주림 등에 의해 탈주병들이 많아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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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1월 6일, 비변사에서 이순신 이하 모든 수사(수병들의 장교)들을 죄주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한산도 싸움에서 이긴 뒤 한번도 적을 무찌르지도 않고 일도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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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12월 1일, 권율이 이순신은 연해에 있는 병사들을 수병으로 옮겼다며 상소하였다. 아마 수병이 부족해지자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육군을 징발해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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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6월 18일, 대세가 바뀔때까지 수로를 차단하다가 육군과 수군이 같이 진격하는 계책에 대해 논의했을때


유성룡이 "수군에 전염병이 많이 돌아 이순신이 움직일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선조가 "지역의 수령들이 이순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며 여러 수군 장수들끼리도 화합하지 않는다고 하니 문관을 보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정경달이 내려갔다고 말하였다


당시 무관보다는 문관이 더 권위가 있었는데 수군들이 서로 분열되기 시작하자 조정에서 문관을 통솔자로 보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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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8월 21일, 조정에서 계책을 논의했을때


이조판서 김응남이 항왜(항복한 일본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수군을 공격하자는 계책을 내자 유성룡이 기존의 군량 보급로를 끊는식의 지구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선조가 "이순신이 혹시 일을 안하는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는데, 이는 군량 보급로를 끊는 지구전 전략을 세우고 하달해도 적의 군량이 계속해서 유지되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이에 유성룡이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되는것도 어려웠을것이라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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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11월 12일, 조정에서 이순신과 원균의 다툼에 대해 논의했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승전은 사실 정운이 협박하여 부득불 가서 격파한것이었으며, 다른 경우에서도 이순신은 공격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선거이라는 부하장수가 힘써 주장하여 공격하였었는데 공은 이순신이 다 차지하고 이순신의 부장들만 벼슬이 높아져서 원균이 (더이상 착취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에) 이순신과는 같이 협동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순신도 이순신 나름대로 원균이 공을 받을때 겨우 10살밖에 안된 원균의 첩의 자식을 군공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하였다며 원균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 2월 4일 기사를 읽어보면, 이덕형이 말하기를 "둘이 대질심문을 시켜보았더니 원균은 그 자식은 이미 18세가 되었으며 활도 쏠줄 안다며 세세하게 말하는 반면 이순신은 궁색하게 말을 잘 못하였다"고 했다. 아마 이순신의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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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11월 22일, 사헌부에서도 이순신에 대해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수군들은 한사람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도 않고 그저 배회하거나 왔다갔다만 할뿐이었으며, 사후선 3척이 실종되었을때도 서로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으며 장황한 거짓말만 하였다는것이다


(* 나국(拿鞫)이라는 말은 죄인을 잡아다 국청에서 심문한다는 뜻으로, 중죄인처럼 다스려야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22일부터 26일까지 계속해서 사헌부와 사건원 등에서 탄핵상소를 7번이나 올렸다



초반에 유인전으로 반짝 한번 승리한것을 제외하면 그 이후 전공도 하나도 없고, 보급로를 끊는다는 지구전 일도 제대로 하는것같지도 않고, 여러 거짓말들을 치는 등 왕까지도 기만하였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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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12월, 결국 이순신을 체차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비변사에서 원균을 병사로 삼는것은 부적합하다는 건의를 올렸다


또 사간원에서도 원균에게 그대로 수사의직을 맡기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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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6월 26일


주역을 강독했을때 선조가 김응남이라는 신하에게 "이순신은 처음에만 힘껏 싸웠을뿐 그 이후에는 토벌하는데 열심이 아니어서 의심하고 있다. 동궁이 남쪽으로 내려갔을때 여러번 사람을 불렀는데도 오지 않았다" 라고 하자


이에 김응남이 "원균 또한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을때 사람을 시켜 이순신을 불렀으나 오지 않자 통곡하였습니다"고 말했다


선조가 "이순신은 일을 잘할수 있는자인가?" 라고 하자


김응남이 "장교와 병사들 말에 따르면 중도적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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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10월 5일, 이원익이 선조를 알현하였을때 여러 이야기들을 했었는데


선조가 이것저것 묻다가 "이순신은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처음의 승전 이후 단 한번도 제대로된 전투가 없었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일을 맡겨도 적의 보급은 여전했기 때문에 의심이 들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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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2월 4일, 사헌부에서 이순신은 바다에서 5년이나 보냈는데도 아무일도 안하고 남의 공로를 빼앗으며 조정을 기망하였다며 탄핵 상소를 올렸다


그동안 일을 하는지 안하는지 의심이 들었던때에 1597년 1월 1일, 일본과 조선의 이중간첩이었던 요시라로부터 가토가 도해하는것을 대놓고 알려줬고 이에 비변사측에서 즉시 이순신의 출동을 명했으나 풍랑 등의 여러 이유들로 출동을 하지 않아 결국 도해를 허락하게된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동안 거짓말들을 많이 쳤기 때문에 풍랑에 의해 갇혔다는 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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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2월 6일, 결국 이순신의 탄핵이 결정되고 김홍미에게 전교하여 잡아오도록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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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7월 22일, 그러나 약 5개월 뒤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 통제사라는 어마어마한 관직을 내린다


왜냐하면 1597년 7월 18일, 칠전량에서 원균이 대패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이억기 또한 전사한다)

그래서 인재가 하나도 없게된 조정측에서 서둘러 4일만에 이순신을 다시 복권시키고 삼도를 아우루는 통제사로 임명하게 된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순신의 활약이 실록에서 많이 보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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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6월 24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순신은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황폐한곳에 주둔하고 있으며 가까스로 자급자족을 하고 있는데, 중국의 많은 장수들이 형편을 헤아려주지도 않고 끊임없이 독책만 하고 있다"며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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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8월 13일, 이순신이 상소를 올리기를 "해상 전투에서 아군이 적선들을 쳐부수었는데도 중국 군선들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적의 수급을 벨때 협박하여 40여급을 빼앗아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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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8월 24일, 일본군이 철수하고 있는 정황들이 보이자 조선 조정에서도 이에 대해 술렁거렸는데


이덕형이 상소하기를 "적이 아직도 성곽을 고치고있으며 야간에도 불을 밝히고 있으니 진을 철수한다는 소문은 헛된 보고입니다. 이순신과 중국 장수는 적이 철수할때 기회를 엿보아 섬멸하려고 수군을 정돈하여 내려갔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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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1월 24일, 조정에서 이순신의 후임을 논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라 전군 철수령이 내려진 상황 속에서, 전군이 철수하는 가운데 순천 왜교성만 포위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수륙 양면으로 공격을 하였으나 조명 연합군측에서 큰 피해를 받은 뒤 포위를 유지하는 대치 상태속에 있었는데


순천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가 진린에게 뇌물을 줘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는 배를 보내자, 철군 준비중이던 시마즈는 그의 사위였던 대마도주 요시토시에게 300여척의 군선을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또 이 외에도 여러 군선들이 도착하였다


이에 조명 연합군과 구원하러 온 일본 군선들이 싸우게 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의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하게 되었다 (11월 18일의 노량해전)


그리고 6일 후 조정에 그 사실이 알려지자 24일에 이순신의 후임을 논한것이다






개인의 일기나 야사가 아닌, 정식 조선왕조실록만 보자면 이순신은 전쟁이 벌어진 직후 한산도와 당포 등에서 여러번 승전하였으나 이후에는 지지부진했던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제대로 수행은 하는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적의 보급은 여전해서 의심을 사기도 했다


그러다가 칠전량 해전의 패배 이후, 1597년 7월부터 1598년 11월까지의 1년 4개월동안 갑자기 활동을 많이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처음 몇번의 전투에서의 대승과, 임진왜란 끝나기 1년전에만 활약을 한것이고 그 나머지 기간동안에는 활약이 거의 없었던것이다


아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동안에는 기회가 전혀 없어서 어쩔수없이 활약을 못하다가 명나라군과 합동하게 되니 다시 활약을 하게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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