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의 공중목욕탕.
작성자 정보
- 실라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01 조회
- 3 댓글
본문
일본의 공중목욕탕의 역사는 승려들이 몸을 정화하기 위해 사찰에 설치한 목욕탕을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개방한 것이 시초라고 말하여지지만
요금을 내고 탈의실이 존재하는 등의 오늘날의 목욕탕과 같은 형태는 가마쿠라 시대가 그 시작으로 여겨진다.
무로마치 시대 교토의 거리엔 공중 목욕탕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이 당시의 목욕탕은 일종의 사우나인 증기탕 형태였다.
초기 공중목욕탕의 형태는 위와 같은 증기를 이용한 사우나 + 간단한 족욕 정도의 형태였다.
위의 여성 직원들은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거나, 간단한 마사지 그리고 성적인 서비스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전통 유흥(?) 창녀촌들을 위협할 정도로 일본에서 인기였다고 한다.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에 개인 욕실을 구비하였지만 서민들은 이 공중목욕탕을 즐겨 이용하였다.
물은 여러번 재탕되었으며 혼욕탕도 존재하였지만 완전히 발가벗은 것은 아니고 간이 유카타와 같은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1791년 혼욕탕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목욕탕에서의 남/녀 구분 시도가 이루어졌다.
입구의 천, 탈의실 등 에도시대의 공중목욕탕은 오늘날 대중들이 이용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갖추었다.
후기의 그림에선 이쑤시개, 수건, 빗등을 진열한 판매대까지 등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남탕의 경우 여탕과 달리 2층 형태의 구조였는데 이유는 사무라이 계급의 경우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기 때문에
이 칼을 진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바둑이나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고도 전해진다.
흙먼지의 건축이나 토목 노동자들이 일과를 마친후 이 목욕탕에 들르는 것은 이미 대중적이고 흔한 일이었다.
시간은 보통 아침 8시에 개장하여 저녁 8시까지 운영하였으며 요금은 오늘날의 가치로 100엔 ~ 200엔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등 같은 것은 있었지만 저녁의 목욕탕은 암흑에 가까웠을 거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여러 그림들을 보았을때 아마도 로마식의 몸을 담글수 있는 탕이 중심이라기 보단
저런식으로 물을 담은 곽을 기준으로 바구니로 물을 퍼서 씼는 광경이었던 것 같다.
물론 이런 형태도 존재했고 말이다.
저 당시에도 여탕은 성적 환상의 한 요소였던 건지 여탕은 춘화의 단골 소재였었다.
....님의 댓글
실라님의 댓글
....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