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이 된 조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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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왕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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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된 조선인들
"가는 곳마다 통행 증서를 조선인들에게 배포해 민심을 잡고있습니다.
조선의 영주들은 백성들을 학대해왔으므로 그들에게 인정과 관대함을 베풀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탄금대 전투 직전 히데요시에게 보낸 편지
상이 하문하기를,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4일 계해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삼가 생각하건대, 어가(御駕)가 궁궐을 떠나던 날 신은 순릉 향사(順陵香使)로서 대궐문까지 달려갔다가 우연히 본 일입니다. 모여 있던 장수들의 눈을 흘기고 달아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다.’016) 라고 하였고, 싸우러 가던 병사들도 병기를 질질 끌고 도망가면서 ‘임금이 왔으니 이제는 살아있구나,017) 기꺼이 적군을 맞이해야지.’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4일 계유 3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상이 이르기를,
"시장 백성들이 다 적에게 부역한다는데……."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어찌 색다른 무리들과 더불어 상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잠상인(潛商人)들의 소행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아무리 멀리 가신다고 해도 적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서 방비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두수로 하여금 편의대로 종사(從事)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8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사법-탄핵(彈劾)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3일 임술 1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12일 을미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왜적이 버리고 간 포로들을 불러 생업에 종사하게 하자고 아뢰다국역원문 . 원본 보기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를 보니, 왜적은 거의 모두가 바다를 건너 귀환했고, 다만 포로로서 남게 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왜적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바닷가에 버려져 있는데 당황하여 갈 곳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속히 불러 그들로 하여금 바른 길로 돌아와 생업에 복귀하게 하라는 뜻을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모두 믿을 수 없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39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9면
【분류】
구휼(救恤)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현소(玄蘇)와 평의지가 다 왔다고 합니다. 또 적의 방(榜)을 보니 ‘군현(郡縣)의 백성들은 남자는 보리를 거두어 들이고 여인은 길쌈을 하면서 제각기 가업을 돌보라. 군사들이 법을 범하면 극형에 처하겠다. 천정(天正) 2년 시중(侍中) 평의지(平義智)’라고 서명했다 합니다. 또 ‘우리는 너희 나라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치려고 하는데 너희 나라가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와서 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0일 기사 6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해외(海外)의 오랑캐가 한번 변경을 침범하자 고을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 무너져 그들의 향도(嚮導)가 되었는가 하면 경성 안의 백성들은 어느 한 사람 적을 막는 자가 없었습니다. 적이 아직 재를 넘어오기도 전에 이미 투항할 뜻을 가지는가 하면 길거리의 떠도는 말은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더니, 드디어 종묘 사직이 폐허가 되고 성곽과 대궐은 불에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10일 기사 9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