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시에이션 러브>와 통과의례 이후의 日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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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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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에이션 러브>의 포스터(출처:네이버검색)
이니시에이션 스토리(initiation story)라는 말이 있다. 문학용어인데, 작품의 주인공이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을 다룬 내러티브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인간적 성장을 다룬 교양소설(教養小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를테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선생의 <가면의 고백仮面の告白>이 그러합니다. 출생부터 2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칼날처럼 묘사한 자전적 소설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난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
정말 기막힌 흡입력으로 시선을 끄는 문장이 가히 아닐 수 없겠습니다. 小生에겐 그 문장이 통과의례 같은 성장의 표상(表象)으로도 보이더군요.」
그런데 실제로도 日本에서는 イニシエーション이 입회, 시작이라는 의미 외에도 통과의례라는 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
2015년(平成 27년)에 제작, 상영된 영화 한 편은 제목에 이니시에이션을 아예 걸어 놓았다. 바로 <이니시에이션 러브イニシエーション・ラブ>다.
정말이지 이 영화를 떠올리면 뭐랄까, 으음,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イニシエーション・ラブ>는 미시마 선생의 문장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난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 같은 앤솔러지를 눈앞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희열을 주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희열감(喜悅感)의 성격 또한 격정으로 전화(轉化)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예컨대 한여름 날, 누군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당신의 뒷덜미에 갑자기 찬물 한 사발을 조용히 쏟는 것처럼. 그럴 땐 당신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뒷덜미를 조용히 타고내리는 물줄기에 소름을 흠씬 느끼고도 남을 테다. 물론 이때의 소름은 일종의 엑스터시(ecstasy)나 다를 바 없다. 빈말이 아니다, 경험해 보시라.^^
그와 같은 희열을 줄 정도로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내러티브가 독특하다는 얘기다. 또한 반전의 미덕이 무엇인지를 극명히 웅변하고 있어, 가없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그 웅변은 지독한 가독성(可讀性)의 <가면의 고백>처럼 자못 치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영화의 타이틀백에서 감독은 대놓고 호소한다. 이 영화에는 비밀이 있다, 극장을 나간 후 다른 분들에게 부디 이 비밀을 털어놓지 마시라, 라고.
같잖군, 어떤 비밀이기에 그래? 하고 기세 좋게 대꾸하기엔 영화의 비밀은 개발되지 않는 태고의 자연처럼 장엄하다. 비밀이 반전이기 때문에, 이 경우 스포일러는 치명적인 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여 小生은 차마 내러티브에 대해 뭐라고 언급할 순 없다.
다만 小生과 같은 희열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은 아무런 정보 없이 태고의 자연을 경험하면 되겠다. 일례로 가고시마(鹿兒島)의 사쿠라지마(桜島)가 여전히 감동적인 까닭은 그곳이 태곳적의 정적과 위엄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니시에이션 러브>의 리뷰는 내러티브 이외의 요소에 대해 얘기해야 마땅하다. 하여 몇 마디 言說해 본다.
<イニシエーション・ラブ>를 이미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무려 1980년대다. 정확히 1987년 7월 10일을 전후로 한다. 80년대의 日本?
주지하다시피 日本의 80년대는 거품경제가 팽창할 대로 팽창한 시기였다. 굳이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日本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창코나베(ちゃんこ鍋) 요리처럼 끓어올랐던 것을 모르진 않을 테다.
「정치는 보수정당 자민당(自民党)의 주도로 안정적이었고 경제와 문화는 세계를 당당히 제패(制霸), 의연히 휩쓸었답니다. 소니(ソニ) 카세트로 듣는 곤도 마사히코(近藤真彦)의 긴기라기니 사리게나쿠(ギンギラギンにさりげなく)는 日本文化가 무섭도록 전면 금지되어 있던 당시 한국에서도 엄청난 열풍으로 몰아쳤습니다. 디스코클럽에서의 단골 뮤직으로 당대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노래의 리듬에 맞춰 한 번쯤 춤을 춰봤을 겁니다.^^」
그러나 거품은 언젠가는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80년대를 넘으면서 거품은 정점을 찍은 후 꺼지고 말았다. 바야흐로 <양적 성장量的成長>의 시대에서 <질적 성장質的成長> 그리고 <질적 성숙質的成熟>의 시대로 힘차게 전화된 것이다. 성장의 결실을 유지시킨 채 말이다.
현재 日本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 데니스 가보르(Dennis Gabor1900-1979) 선생이 정의한 안정·균형 상태의 성숙사회(mature society 成熟社會)로 진입한 지 오래되었다. 이건 재론의 여지도 없는 참 명제다.
아니, 성숙사회를 넘어 이젠 초성숙사회(超成熟社會)라 命名해야 옳겠다.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가 사회의 기저(基底)로 구축되어, 집단지성(集團知性)의 발현 형태인 민도(民度)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크고 깊고 넓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日本이 성숙사회 이상의 경지에 올라와 있음은 사실상 부인하긴 어렵다.
하면 초성숙사회인 日本에게 있어서 80년대는 무엇이었을까?
단연 이니시에이션이다. 지금의 日本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통과의례였다는 얘기다. 물론 개인이나 집단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한 통과의례>를 치렀다고 무조건 성숙되진 않는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세계에 대한 통찰 없이, 호황과 불황의 주기적(週期的) 경기순환(景氣循環)의 궤도에 올라타 버리면 속 빈 강정만 되기 십상이다. 우연(偶然)은 결코 필연(必然)으로 업로드 되지 않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