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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에이션 러브>와 통과의례 이후의 日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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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지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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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에이션 러브>의 한 장면(출처:네이버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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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당신도 만약 무엇인가의 통과의례 속에 있다 하더라도 <자기에 대한 성찰과 상대에 대한 통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이후가 보장될 순 없다. 특히 자기에 대한 성찰은 최우선이다. 왜냐하면 성찰(省察)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세계를 엄정히 파악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떠한 결과물이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남 탓부터 일삼지 않는다. 자기를 먼저 성찰하고 세계를 통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부류라면 남 탓부터 늘어놓기 일쑤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라고 책임 전가를 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라면 당연히 조정과 협치는 불가능해진다. 상대와의 분쟁만 일상화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면 그 공동체에선 너 나 할 것 없이 격정을 밥 먹듯 쏟아낸다. 격정은 자못 주관적이다. 거기에 객관의 냉철한 사색은 진입될 수 없다.

「빈말이 아닙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세요. 매일같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이 친지 중에 있다면 유심히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은 사색하지 않고 늘 누군가를 탓하고 있을 겁니다. 사색이 성찰의 첩경임을 방증(傍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통과의례 속에 있다면 사색이 구현시키는 성찰과 통찰로 이후를 모색해야 타당하다. 예컨대, 딱딱한 일례이긴 하지만 여전히 日本의 정국을 리드하는 自民党과 이제는 뒤웅박 신세가 되어 버린 사민당(社民党-前身은 社会党)의 경우를 보면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을 테다.

자, 돌이켜보자. 자민당과 사회당은 55년 체제를 일구어 낸,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보수와 진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거대 정당이다. 당연히 다른 시기와는 달리 창코나베처럼 들끓었던 80년대가 그 두 정당에게도 <특별한 통과의례>라 하지 않을 수 없을 터다. 80년대의 끝물인 1990년 2월 18일의 중의원(衆議院) 선거 결과만 봐도 과연 그러했다.


그때 自民党은 선거에서 275석을 획득했다. 社会党은 136석이었다. 허나 自民党은 338명의 후보를 낸 상황에서의 당선이라 비율로 보면 81.4%, 사회당은 149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136명이나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거기에다 진보 쪽 무소속 후보 3명이 당선으로 합류해 139석이나 확보했다. 당선비율로만 보자면 자민당을 압도하는 91.3%였다.

그리고 80년대가 지났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된다. 이니시에이션을 거치면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 정당은 성숙되지 않으면 도태될 위기에 놓여 버린다. 당연히 내부 성찰과 세계 통찰을 통해 <질적 성장質的成長>과 <질적 성숙質的成熟>을 추구해 나가야 마땅하다.

실제로 창코나베가 식은 후의 부작용은 사뭇 심상치 않았다. 1990년 1월에 3만 8천엔 정도였던 평균 주가가 그해 10월에는 2만엔 미만이 되어 버릴 정도였다. 금융권의 불량채권 문제도 잇따라 터져 나왔다. 이 객관적 지표를 앞에 두고, 엄격한 현실 인식으로 뼈를 깎는 개혁을 해내지 않으면 질적 성장은 결코 이루질 수 없는 법이다. 과연 그 두 정당은 해냈을까? 그 결과는 93년 중의원 선거 결과로 표출됐다.


자민당은 공인후보 285명 중에 223명을 당선시켰다. 당선비율은 78.2%. 전 회보다는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나마 선전한 편이었다. 사회당은 142명의 후보 중에 겨우 70명이 당선되었을 뿐이다. 49.3%의 당선비율이었다. 그야말로 사회당만의 치명적 <단독패배>였다.

93년 이후, 정계(政界)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자민당을 배제한 연립정권이 세워지기도 했고, 자민당과 사회당이 연립해 정권을 창출하는 전대미문의 장면마저 나왔다. 격동의 부침이 공동체로 넘나들었다. 모두가 개혁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모두가 성숙된 경지로 올라가지 못했다. 성찰과 통찰로 안정과 균형을 잡은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성숙되지 않은 집단은 분쟁으로 점철되는 자중지란(自中之亂)만 불러일으킨다. 사회당이 딱 그 꼴이었다.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1996년 1월 사회당은 사민당(社民党)으로 당명을 개칭(改稱)했다. 이로써 1945년 11월 2일 창당된 사회당은 이니시에이션 속에서, 그 이후에도, 성찰과 통찰로 자신을 성숙시키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안타깝게 사라지고 말았다. 응당 1996년의 선거에서도 사민당은 달랑 15석만 얻는 초라한 모습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민당은 239석이었다.


물론 자민당이라고 호락호락 개혁을 성공시킨 건 아니었다. 각종 우여곡절을 다 겪었다. 그래도 그들은 고이즈미(小泉純一郎) 전 총리의 자민당을 때려 부수겠다는 무시무시한 모토마저 한때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당내 개혁에 적극적으로 임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레이와(令和) 원년(2019년), 현재 自民党은 중의원에서 283석. 사민당은 2석이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특별한 이니시에이션>이 눈앞에 자리 잡는다.

누구나 이니시에이션을 통과했다고 해서 곧바로 성숙되진 않는다.

성장과 성숙은 자신의 뼈를 깎는 내부 성찰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엄격한 세계 통찰이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자민당과 사민당의 경우는 그 점을 엄정히 역설시키고도 남는다.


「영화 <이니시에이션 러브イニシエーション・ラブ>는 통과의례에 임할 때와 그 이후의 성찰과 통찰을 환기시켜 주는 알레고리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80년대의 풍물을 꼼꼼히 살필 수도 있고, 당대를 휘어잡았던 노래들을 듣는 즐거움도 넘칩니다. 전력으로 추천합니다.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 선생의 <가면의 고백> 첫 문장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난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도 가히 의미심장합니다. <말했다>가 아니라 <우겼다>이니까요. 화자가 자신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도 화자의 성찰이 구현되어 있으니 教養小説의 첫 문장으로서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역시 일독을 권하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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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유지군님의 댓글

  • 유지군
  • 작성일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lt;안정과 균형&gt;;은 개인이나 공동체에게나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 생각합니다. 성숙의 경지로 올라서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존재해야 될 관건이라 판단합니다. 여기를 들어오는 여러분 모두에게 안정과 균형을 체화해 배려와 조화가 넘치는 나날을 보내시길 마음 깊이 소망합니다. 물론 小生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답니다.^^다들 행복한 주말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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