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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과 에티오피아 제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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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이 존재하던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에 아프리카 국가의 대부분은 서양 국가들의 식민지로 존재했고 따라서 아프리카 대륙에 접촉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독립국이었던 에티오피아 제국과 일본제국은 교류가 꽤 존재했다.
일본에 에티오피아란 국가의 존재가 알려진 건 더 오래됐는데  1675년에 아르메니아의 상인이 에티오피아 제왕의 대사를 자칭하며 인도네시아에서 얼룩말 두 마리를 천황께 헌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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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제국과 일본 제국 모두 유색 인종 국가로서 서양 국가를 상대로 전쟁해 승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국가가 외교적으로 처음 접촉한 건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데 국제연맹이 설립되고 에티오피아 제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 대표와 훗날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가 되는 터폰리 머콘는(하일레 셀라시에)가 회담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하일레 셀라시에는 유럽에서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중에 이집트 포트사이드에서 일본 영사관 부영사를 만나고 해당 부영사는 그대로 에티오피아 제국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방문한다.
그는 에티오피아 방문 후 일본제국 외무성에 에티오피아가 일본의 면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에티오피아와의 경제 관계 수립의 필요성을 보고했고 1926년에 다시 에티오피아 제국을 찾아간다. 그리고 1927년에 양국은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1930년 비준)
다음해인 1928년에 일본은 아프리카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조사를 위해 영국령 동아프리카,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마다가스카르, 에티오피아 등을 순회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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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에티오피아 제국 최초의 성문 헌법을 제정하는데 해당 헌법은 일본제국의 헌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에티오피아 지식인들이 일본을 비서양 국가가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흡수해 자신들에게 맞는 형태로 바꾸는데 성공한 사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일레 셀라시에는 일본제국에 사절단을 보낸다. 당시 사절단에 포함된 멤버는 Teferi Gebre Mariam, Araya Abeba, Daba Birro 등이고 사절단장은 Heruy wolde라는 사람인데, 에티오피아 최고작위(일본으로 치면 공작)에 해당하는 엘리트였다.
위 사진이 바로 사절단이 기모노를 입은 모습이다.
Heruy wolde는 일본제국을 본받고, 특히 군사 훈련과 현대화에서 일본제국을 모델로 삼기를 바랐으며 이를 바탕으로 에티오피아 제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원했다. (군복조차도 일본식 군복 채택을 고려한다.)
보통 일본제국의 이런 점을 배우려던 세력을 아시아로만 알기도 하지만 일본 제국은 저 멀리 아프리카 국가에도 감명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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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에티오피아 제국에서 일본을 우러러 보는 학파를 두고 "Japanizer"라고 한다. 헤루이는 그런 Japanizer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Japanizer는 20세기 초 에티오피아제국과 일본제국을 비교하고,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에티오피아 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했었다. 헤루이는 일본과 에티오피아가 유사하다고 생각했고 일본이 더 번영하고 성공적인 국가임을 인정했다. 1932년에 그가 집필한 Mahidere Birhan : Hagre Japan 이란 저서는 그의 사상이 드러난다고 한다.
또다른 Japanizer로는 Tekle Hawariat Tekle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메이지 헌법에 기초한 에티오피아 제국 헌법 작성에 기여했고 Gäbre-Heywät Baykädañ란 사람은 정부의 간행물에서 "일본 제국을 본받아라, 아니면 노예가 되어라"라는 문구를 적었다.
아무튼 Japanizer들로 구성된 사절단은 일본에 방문했고 3주 동안 각지를 방문했다. 또 히로히토 천황에게 사자 두 마리를 선물했다. 이들은 1934년에 《ማኅደረ ብርሃን ሀገረ ጃፓን》(일본에는 "대일본"으로 번역)라는 일본 각지를 방문한 기록부터 일본인들의 습관까지 담긴 책을 집필했다.
그리고 일본 역시 에티오피아에 직물, 잡화, 약물, 유리, 술 등을 견본으로 가지고 간 사절단을 보낸다. 이를 계기로 양국의 무역은 매우 활발해져 1933년 에티오피아에서 일본 직물의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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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헤루이 사절단을 환영했으며 에티오피아 제국과의 우호 관계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에티오피아 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색 인종간의 동맹 관계"까지 발전시키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1934년 5월에는 이토 히사오라는 가수가 "에티오피아의 노래"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매했는데 당시 일본 사회에서도 에티오피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야마모토 시치헤이에 의하면 당시 초등학생들이 에티오피아도 만세일계일거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황실과 에티오피아 황실의 혼담 썰도 돌았는데 실제로 에티오피아 황실이 일본인과 결혼할 뻔 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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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에티오피아 황실과 일본인의 혼인 얘기까지 존재했다.
일본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제국의 사절단에는 에티오피아의 황실 인물들도 있었는데 일본인 여성의 정숙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됐다고 한다.
일본 측에선 이에 신문 광고 등을 통해 20명 가량의 일본 여성을 뽑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자작의 딸인 "구로다 마사코"라는 여인이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황자인 아라야 아베베의 혼인 후보가 됐다.
그녀는 평소에도 해외 사정에 관심이 깊었고 에티오피아에 이민까지 생각했으며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결혼은 일본의 에티오피아 진출과 우호 관계를 경계했던 이탈리아를 자극할 여지가 있었다. 또 에티오피아에 일본이 성공적으로 경제적으로 진출하자 영국, 프랑스,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백인들도 이를 굉장히 경계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사정이 겹쳐 없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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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절단장인 헤루이는 에티오피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줄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외무 장관이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신문에다 대놓고 에티오피아 토지를 일본인에게 대여해주고 일본의 상공업 시설을 설치할 거라고 말했다.
거기에 1934년 일본-에티오피아 양국은 타나호 주변에 10만명의 일본인을 보내 관개 시스템을 지원한다는 관개 개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실현됐다면 브라질처럼 에티오피아에도 대규모의 일본인 이민이 이루어졌을지도.
일본은 그 해에 에티오피아에 유다카 츠치다로 구성된 순찰단을 보내기도 했는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양 열강으로부터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유지시키고 경제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좋은 기회로 보았지만 먼 거리로 인해 점령 대상으로 보진 않았다.
에티오피아 황제는 순찰단 방문에 대해 무기 수입을 요청하고 일본 군수품 공장의 건설해줄 것, 조종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실제 소득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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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입장에선 당시 무솔리니가 동아프리카 제국의 건설과 투자를 주장하던 상황이었으니 일본 제국이 에티오피아와 동맹 관계라도 체결했다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일본 제국이 에티오피아 제국과 우호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굉장히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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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우려는 1934년 12월 5일 에티오피아군과 이탈리아군이 국경 지대에서 교전이 발생하며 극대화되었다.
무솔리니는 이 일에 대해 에티오피아 제국에 말도 안 되는 배상을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을 에티오피아 제국에게 강한 입장을 보일 것을 촉구하고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공급한다며 거짓말로 비난했다. 이탈리아는 황화론을 인용하며 에티오피아에 대한 분노와 일본에 대한 경계를 통합한다.
당시 로마 대사인 스기무라 요타로는 이탈리아에게 에티오피아에 정치적 야망이 없다고 해명하고 에티오피아의 무기 요청에 일본이 무기를 공급할 권한이 없다고 거부한다.
일본 내에서도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를 두고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먼저 신중한 외교정책을 선호하고 서양 열강과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자들이 있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설 것을 주장하는 초민족주의자들이 대립했다.
스기무라 요타로 대사는 실용주의자들의 의견을 지지하며 초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일본 대중을 비판한다.
"인종적 우려를 바탕으로 일본 여론은 자연스럽게 약한 나라에 공감하고 에티오피아를 도우려 한다. 일본의 군사력과 정치력은 아프리카에선 동아시아에서만큼 강하지 않다. 무기와 탄약을 (에티오피아에게) 공급할 권리를 주장하여 이탈리아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강화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
일본 외무부 차관은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이탈리아의 의혹을 부인했으나 무기를 공급할 권리 자체는 인정했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일본이 "백인 문명을 배신한다"고 주장한다.
에티오피아는 일본에게 잠수함을 요청하고 최소한 일본이 에티오피아의 편을 들어주길 간청했으나 일본은 워낙 사안이 민감해져 보증을 거부한다. 단순히 이탈리아 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등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거느린 국가들조차 일본의 에티오피아 진출을 우려했고 소련과 미국조차 자국 언론에서 일본이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뉴스를 실을 정도였으니 에티오피아와 깊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곧 모든 백인 국가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에 가까웠으니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무기를 공급한다는 얘기는 에티오피아와 일본 모두 부인했으나 이탈리아는 편집증적으로 이러한 의혹에 집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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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는 그래도 일본에게 계속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1935년, 에티오피아 국방 사관학교 장인 Dada Birrou는 일본을 방문해 군수품과 의료품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문은 4년전 헤루이가 방문했을 때처럼 일본의 대중을 흥분시켰다. 도쿄역에선 약 2,000명의 민족주의자들이 "Down with Italy"라는 현수막을 들고 다녔고, Dada Birrou는 "에티오피아 문제 협회"를 포함해 일본 내 민족주의 단체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서양은 이런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행동에 더욱 의구심이 커졌지만, 서양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더 약해졌다. 일본은 에티오피아적십자사에 텐트와 의료품을 보내는 것에서 선을 그었고, 결국 1936년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게 점령된다.
이탈리아는 일본이 에티오피아를 군국화한다는 거짓된 뉴스를 잘 이용해 단기간에 에티오피아 정복에 대한 국내, 국외 여론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빠르게 침공한 이유를 정말로 일본이 에티오피아를 차지하기 전에 선수쳤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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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대단하네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이런 자료들만 봐도 태평양전쟁보다 대동아전쟁이 맞는 단어인 듯.

ㅌㅊ님의 댓글

  • ㅌㅊ
  • 작성일
저런일화가 있었다니 신기하다

Kitano_Takeshi님의 댓글

  • Kitano_Takeshi
  • 작성일
일본제국이 에티오피아와도 관계를 맺었었구나...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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