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반 분류

일제시대 건설된 신흥도시

작성자 정보

  • ㅇㅇ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48 조회

본문



한일합병 당시 우리나라 도시중 인구 5만명을 넘은 곳은 서울과 부산뿐이었다. 인구 1만명에서 5만명 미만의 도시로도 인천, 개성, 전주, 광주, 통영, 동래, 해주, 평양, 진남포, 함흥, 원산 등 12개에 불과했다.
 
수백년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해안도시들이 크게 발전한 것은 1876년의 개항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많은 해양국가들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방법중 하나는 해안에 침략거점을 설정하고 내륙과는 철도로 연결하면서 자원의 반출 및 상품양륙을 도모하는 이른바 ‘루트’ 개설이었다.
 
일본도 이와같은 전략을 이용하여 진남포, 평양, 인천, 해주, 군산, 죽도, 목포, 마산, 거제, 부산, 울산 등 우리나라의 서남해안 일대에 대하여 일본인의 취락을 형성했다. 또 이 해안도시들의 개시장(開市場)으로 간주하고 일본선박들의 출입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조건으로한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어 일본은 어업이민단을 모집하여 우리나라 해안도시에 정착시킴으로써 해안도시와 도서들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도시의 초기는 개항과 수산기지의 설정으로 이루어졌다. 그 증거로는 한·일합병 당시 인천의 경우 전체인구의 41.5%가 일본인이었고 군산 47%, 부산 34.5%, 목포 90.3%, 신마산 63.4%, 청진 88.1%, 신의주 63.1%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의 우리나라 해안도시들은 가히 일본인 도시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5년말 현재  일본인 1천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던 도시는 39개였다. 이 가운데 개항장을 포함한 해안도시가 22개였다는 것을 보면 당시의 사정으로 짐작할 만하다.
 
일제하에서 생겨난 신흥도시를 넓은 뜻에서 말한다면 부산이나 인천, 원산, 청진, 마산 등도 포함할 수 있으나 이들 도시는 한·일합병 당시 이미 인구 1만명을 넘어선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범주에서 일단 제외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철도부설과 겸하여 짧은 시일안에 큰도시로 발전한 신흥도시로는 청진, 목포, 군산, 진남포, 성진, 웅기, 신의주 등을 들 수 있다. 이 도시들은 뒤늦게 개항한 도시들로서 개항당시의 인구는 3천명 내외의 소도읍에 불과했으나, 해방당시는 ‘부(府:市)’로까지 발전했다.
 
이 도시들이 발전한 과정을 보면 해안도시란 공통점을 가지는 한편, 초기에는 일본의 거류민단을 중심으로한 조차지(租借地) 개발에서 비롯하여 그후 철도의 연결에 따른 종착역의 기능과 탄토항(呑吐港)으로서의 기능이 도시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청진은 러·일전쟁 때만해도 쓸쓸한 어촌에 불과했으나 전쟁때 일본군의 군수품 양육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1908년 개항하게 된 것이 발전의 계기였다. 개항직전 인구는 1천400명에 불과했으나 1913년 부(府)로 승격했고 1917년 청진∼회령간 철도개통과 경도선(京圖線)의 연결로 배후지가 크게 확대됨으로써 물산의 집산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944년에는 18만명이 넘는 큰 도시가 되었다.
 
목포는 1895년 당시 150호의 한촌이었다. 1897년 개항을 계기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해 한일합병 당시에는 3천300명이 거주했다. 이어 1914년에 완공된 호남선 철도의 종착역이 되자 1930년까지 인구가 10.2배, 1944년에는 6만9천명으로 늘었다.
 
군산은 개항당시 170호의 어촌으로 588명이 살았으나 1910년 7천374명, 1944년 5만8천명으로 급성장했다. 일개 갈대밭 어촌에서 부(府)로 신장하게 된 것은 광대한 광야를 가지고 있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유일한 탄토항이었기 때문이다. 1912년 준공한 이리∼군산철도가 군산을 미곡반출의 주항으로 변모시켰다.
 
신의주는 러·일전쟁 때까지만 해도 압록강 하류에 있는 충적층 초원에 불과했다. 1904년에 경의선 군용철도 건설을 위해 임시 철도감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일본인들의 기술자와 그 가족 및 상인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1905년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자 국경을 건너는 취락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잡았다. 1921년에는 의주로부터 평안북도 도청이 이곳으로 이전됨에 따라 시가지 발달이 급속히 진행돼, 1944년에는 인구 11만8천명의 대도시로 발돋움 했다.
 
이밖의 신도시로는 창성이 있는데 이 도시는 수풍댐 건설로 발생한 수몰민 7만명을 이주시키고 군청 등을 설치하여 발전되었다.

출처 : 하우징헤럴드(http://www.housingherald.co.kr)


김의원
경원대학교 명예교수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27,318 / 440 Page
번호
제목
이름
New Comment
  • 댓글이 없습니다.
Member R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