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는 연구들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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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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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택시를 타고 출퇴근하던 사람이 돈을 아끼기 위해 앞으로는 지하철만 타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한 달이 지나 자신의 지출내역을 되돌아 본 그는 깜짝 놀랐다. 저번 달에는 지하철비가 0원이었는데 이번 달에는 지하철비가 무려 7만원이나 나온 게 아닌가! 돈을 아끼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오히려 지하철비 지출이 7만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다음 달부터는 지하철을 타지 말고 다시 택시를 타고 다니면 한 달에 7만원의 지하철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국민이 지하철 대신 택시를 타고 다니면, 지하철 이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연간 10조 원에 이르는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당장 전 국민의 지하철 이용을 금지하는 법률이라도 제정해야 할 것만 같다.
이게 병신 논리임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위 논리는 전부 팩트에만 근거해서 전개되고 있다. 지하철을 탐으로 인해 지하철비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팩트고, 지하철을 타지 않으면 지하철비 상당액을 절감할 수 있는 것도 팩트다. 그러나 팩트에 기반한 분석이라고 해서 꼭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되려면 지하철을 이용함으로 인해 절감되는 비용, 즉 택시비 절감액수도 포함시켜 분석해야 한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으면 그 대체재인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자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비용(이하 ‘자살비용’)은 연간 6조 5천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자살비용은 대개 ① 검시, 구급차, 장례식 등 자살로 인한 직접비용, ② 자살자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서 일을 했더라면 벌 수 있었을 상실된 미래소득, ③ 주변인에게 정신적 피해를 줌으로 인한 주변인들의 심리상담, 휴가 등 비용을 합산함으로써 계산된 금액이다(e.g., Kinchin & Doran, 2018). 자살로 인해 이런 비용들이 발생하는 것은 팩트고, 자살을 하지 않으면 이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도 팩트다.
그러나 팩트에 기반한 분석이라고 해서 꼭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분석이 되려면 자살로 인해 절감되는 비용, 예를 들면 식비, 주거비, 의료비 절감액수, 그리고 자살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으로 인해 주변인에게 주는 정신적 피해도 포함시켜 분석해야 한다(see Yang & Lester, 2007). 자살을 하지 않으면 그 대체재인 ‘계속 살기’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자살비용을 계산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포함되는 항목은 검시, 구급차, 장례 등 자살로 인한 직접비용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장례비는 자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라고 할 수 없다(cf. 사법연수원, 손해배상소송, 2017, 166). 굳이 따지면 장례비는 오히려 자살자가 평균적으로 적게 지출할 가능성이 높다. 자살자는 매장, 수목장 같은 고가의 장례방법 대신 화장의 방식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고, 또 (만약 유가족이 있다면) 자살 유가족들은 자살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장례식도 조촐히 치르거나 아예 생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검시, 구급차 비용의 경우에는, 늙어서 병원에 입원한 채로 죽으면 경찰이 검시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이미 병원에 입원한 상태이므로 구급차가 출동할 일도 없을 것이나, 대신 경찰보다 인건비가 높은 의사가 사실상 검시 업무를 수행하고 또 구급차 출동비보다 비싼 병원 입원치료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것도 자살 대신 늙어 죽기를 택함으로써 ‘절감’되는 비용이라 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상실된 미래소득에 대해 살펴보자. 상실된 미래소득이란 자살자의 국가의 평균적인 실업률, 평균적인 은퇴연령, 평균적인 수입을 고려했을 때, 자살자와 동일한 나이와 성별을 가진 국민이 평균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액을 기준으로 계산된다. 이 계산방법은 근본적으로 ‘자살자는 평균적인 사람’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자살자는 평균적인 사람일까? 자살자는 일반인과 비교해서 정신질환, 신체질환을 갖고 있거나 실업, 노숙, 수감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높고, 성격적인 결함 등 다양한 이유로 사회적으로도 고립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see Van Orden et al., 2010, for a review). 따라서 자살자가 사망함으로써 상실하게 되는 미래소득액은 자살자와 나이·성별이 동일한 사회평균인을 기준으로 계산한 것보다 낮게 잡아야 한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은 노동을 해서 재화를 생산하기도 하지만 소비생활을 통해 타인이 생산해 놓은 재화를 써서 없애기도 한다. 자살로 인해 노동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상실된 미래소득을 계산에 포함시킬 거라면, 자살로 인해 소비를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절약된 미래지출도 계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다. 여기에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기초생활수급, 부양가족 부담분, 국민연금 등 포함), 도박 등 여가생활 비용, 자살자가 정신질환자인 경우 이를 치료·관리하기 위한 비용, 자살자가 상습 범죄자인 경우 범죄로 인해 피해자가 입게 될 손해 및 수사, 재판, 감옥 운영 등 법적 절차에 들어갈 비용, 늙어서 신체질환을 앓게 될 경우 이를 치료·관리하기 위한 비용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자살자가 걸어다님으로 인해 보도블록이 마모돼 교체 주기가 짧아지는 등의 사소한 것들도 이론적으로는 생존비용에 포함된다(Svedberg, 2015). 사회 평균을 기준으로 했을 때 미량의 자본 축적량을 제외하면 생산량과 소비량은 항상 일치하므로, 자살자와 같이 사회 평균에 현저히 못 미치는 사람이라면 미래 소비량이 미래 생산량을 다소간 초과할 거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살로 인해 주변인이 입게 되는 정신적 손해는 어떨까.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자살로 인한 정신적 충격 그 자체는, 자살로 사망했을 때의 충격이 다른 사유로 사망했을 때의 충격보다 더 크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살로 인해 초래되는 무형적 비용이라고 할 수 없다. 주변인을 자살로 잃은 사람들은 사고·질병 등 기타 사유로 잃은 사람들과 비교해서 질적으로 약간 다른 감정을 느끼지만(Jordan, 2001),† 그렇다고 양적으로 더 큰 정신적 손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Parker, 2014). 사실은 주변인의 사망으로 인한 애도반응을 어떠한 ‘손해’로 볼 수 있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 애도반응을 유발시켜 손해(?)를 입게 만드는 유전자가 자연선택을 통해 걸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후대로 전달됐다는 것은 애도가 그로 인한 손해의 크기를 뛰어넘는 적응적 이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see, e.g., Winegard et al., 2014).
설령 자살로 인해, 자살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서 추가적인 정신적 손해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반대급부란 자살자가 죽지 않고 계속 살 때 주변인이 입게 되는 정신적 손해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 생각할 때,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만약 자살한다면……안 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랑스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겹고 짜증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자살한다면? 아주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은, 까딱하면 부도덕한 사람으로 찍힐까봐 선뜻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지만, 귀찮은 사람이 자살하면 후련함relief이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Parker, 2014). 자살자가 살아 있었다면 계속해서 그 사람한테 시달려야 했을 텐데 이제 죽어 버렸으니 더 이상 시달릴 일은 없겠구나 라는, 일종의 앓던 이가 빠진 느낌으로서의 후련함이다.
출처: 웃대 출처: 웃대 출처: 웃대 출처: 웃대 출처: 웃대물론 평소에 그 사람을 좋아했든 싫어했든 간에, 가까운 사람이 자살을 했는데 전적으로 후련함만 느껴질 리는 없다. 당연히 정신적인 충격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정신적인 충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슬픔 내지 상실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일례로, 자살자의 주변인들이 쓰고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엮은 수필집 『어떻게들 살고 계십니까?』에 실린 사례를 보자. 자살자는 글쓴이의 고등학교 친구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글쓴이를 가까이 여기고 ‘소울메이트’라고 부르면서 때때로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평소 심리학 및 정신건강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글쓴이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이해해 주기보다는, 친구가 “힘들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했고, 정신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으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용어와 정보들을 기억해 두”는 등 친구를 본인의 공부를 위한 걸어다니는 케이스 스터디로 활용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진학하고 미술치료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더 이상 친구가 케이스로서의 효용가치가 없어지자, 글쓴이는 아마도 친구가 알아서 눈치껏 떨어져 나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친구의 전화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글쓴이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서 친구에게 새 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방법으로 친구의 연락을 차단했다. 친구는 그로부터 2~3개월 후 자살했고, 글쓴이는 나중에 우연히 그 사실을 전해들었다.
글쓴이가 처음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도 무서웠지만 ‘죽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엄청나게 컸다.” 슬픔이 느껴졌다는 말은 나와 있지 않다. 왜 그랬는지는 글에 명백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자기가 내심으로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슬퍼할 이유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글쓴이가 친구의 ‘자살’을 콕 집어서 원했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글쓴이는 단지 친구가 조용히 사라져 주기를 원했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자살 외에도 ‘어디론가 떠나서 거기서 혼자서 잘 산다’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친구가 이기적이게도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했을 따름이다. 어쨌든, 글쓴이는 친구도 거의 없는 주제에 제멋대로 글쓴이를 소울메이트라고 부르며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골치아픈 정신질환자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별로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전에 비용-편익 분석을 마치고, 자살자를 억지로 계속 살려 두는 것보다 차라리 죽게 놔 두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득이 된다고 판단해 그에 따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서종한, 『심리부검』, 2015, 123면에 등장하는 자살자는 남→녀 성전환자로, 성전환 사실을 고지하지 않고 남자인 피해자를 사귐으로써 일종의 사기연애를 했다. 어느날 그 사실을 피해자는 자살자를 떠나려 했으나, 자살자는 떠나가려는 피해자를 억지로 붙잡아 두기 위해 자꾸만 ‘죽어 버리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때로는 허리띠를 목에 매는 시늉도 했다. 이런 상황이 몇 달 동안 지속되자 이에 질려 버린 피해자는, 이제는 자살자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자기 인생을 위해서는 일단 떠나고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동거하던 집에서 짐싸서 나와 공항으로 출국하기 위해 나섰다. 그날 새벽 5시경 자살자는 문고리에 수건으로 목을 매 숨졌다.
대부분의 자살자는 이처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남에게 폐가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가까이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은 배척하는 경향성을 갖도록 진화했고(Leary & Cottrell, 2013), 타인으로부터 배척되는 것은 자존감의 하락으로 이어진다(Reitz et al., 2016). 반대로 말하면, 타인에게 자주 배척됨으로써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자살자가 대표적으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살자는 타의에 의해, 또는 장기간에 걸쳐 다수의 타인에게 배척된 결과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숨어 지내는 것을 택함으로써 자의에 의해(Richman & Leary, 2009),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던 경우가 많고(Van Orden et al., 2010), 자존감 또한 낮았던 경우가 많다(Jang et al., 2014). 그렇다면 자살자는 생전에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끼치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이렇게 복잡하게 따질 필요도 없다. 애초에 자살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고(Joiner et al., 2016), 정상이 아닌 사람과 엮이는 것이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자살은, 대부분의 경우, 그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적 피해가 아니라 정신적 이익을 가져다 주는 행위다. 잘 와닿지 않는다면 자살의 반대 상황을 가정해서 생각해 봐도 좋다. 평소 짜증나게 하던 인간이 자살한 후에, 갑자기 신이 나타나서 (응답 내용에 대해 철저한 비밀보장을 약속하면서) 그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걸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골치를 썩인다는 이유로 죽이기까지야 할 수는 없는 거지만, 그렇다고 이왕 죽은 사람을 굳이 다시 살려낼 필요까지야 있을까?
자살한다는 원글쓴이에 대한 웃대인들의 답글. 직전 출처이와 같이, 자살은 금전적인 측면에서든 정신적인 측면에서든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비용을 절감시켜 주는 행위일 가능성이 높고, 반대로 자살 예방은 사회적 비용을 절감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비용의 증대를 초래하는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자살예방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의 생명이 자살자 본인의 반대 및 그 주변인들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살려야 할 만큼 존엄한 것이라면 자살은 예방돼야 한다. 당위에 관한 주장과 사실에 관한 주장은 구별돼야 하며, 이 글은 사실에 관한 주장만을 담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 예를 들면 자살로 주변인을 잃은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왕따로 인한 자살로 친구를 잃은 가해자들은 죄책감, 즉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덜기 위해 자살자의 부모가 영안실에 간 틈을 타 평소 알던 도어락 비밀번호를 이용해 자살자의 집에 침입, 자신들의 행위와 관련된 증거를 인멸하기도 한다(e.g., 임지영, 2012). 또한 본문에 서술한 바와 같이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