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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도둑질 도벽 기질은 과거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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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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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울 근교의 도적 출몰과 관리들의 뇌물수수 관행

정치국 극동과 제145호
서울,

1890년 4월 14일

조선의 약탈-도적과 대신-새로운 조칙

첨부 1

장관님,

지난 10월 22일 조선에서 행해지는 도난과 관련된 조칙에 대해 각하께 알려드렸습니다. 국왕은 조칙에서 특히 다음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병사의 임무는 본디 공중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적의 소굴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매우 권력과 유착되어 있고 포도청에 인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궁중이나 관청 또는 기타 행정부서에서 일하는 관리이든지, 포도청이나 각 군영의 병사)이 누가되었든지 간에 보복을 두려워하지 말고 체포되어야 한다. 만일 인맥이 닿은 사람들이 도적을 비호하고 병사가 이들을 체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면 도적으로 간주하여 투옥하여 처벌할 것이다” 만일 실행되기만 한다면 이 시도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유발하겠지만 불행히도 전혀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위층에 있는 탐관오리들은 지속적으로 서로 내통하며 불법행위를 저지르는데 그들 중에 제일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궁이나 아문에서 불순할 일들을 저지르고 나머지 무뢰배들은 백성들의 가옥을 초토화시키고 서울 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으면서 서울의 백성들을 희생시켜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국왕이 새로운 조칙을 발포해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본 공문에 조칙의 번역문을 첨부하였습니다.

무뢰한들의 방약 무도함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대낮에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서울에서 제물포로 가는 도로마저 석양이 지면 전혀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편국의 소포는 풀어 헤쳐지고 여행객의 보따리는 약탈됩니다. 시골로 조금 더 들어가면 무장 강도들이 마을을 약탈하거나 농민들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요구하는 일도 있습니다. 모험심이 강한 한 기독교 선교사는 내륙으로 몇 키로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던 중 슬픈 일을 경험했습니다. 하루 밤 묵기 위해 머무른 지역에 강도떼가 습격했습니다. 아우성 소리에 잠이 깨서 칼을 맞기는 했지만 도망쳤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은 소란에 조선인의 희생 덕분입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사가 제대로 진행되었다해도 범인들을 추적하는 데에는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도적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이 10월 조칙에서 인정한 것처럼 이들 일당에는 대부분 아문이나 포도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거의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고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도적들을 위협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 중의 하나가 재수가 없어 우연히 체포된다 해도 처벌이 매우 경미하기 때문에 거의 처벌 받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최근에 실제로 이런 종류의 범죄가 얼마나 경미하게 처벌되는 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천주교 선교단의 방에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밤중에 도둑이 침입했습니다. 한 장롱을 부수고 200 피아스트르를 훔쳐갔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도둑이 숨어있던 집을 발견해서 훔쳐간 돈의 대부분을 찾았습니다. 저의 노력으로 범인을 체포하여 공범과 함께 포도청으로 인계하였으며 사건을 원활히 마무리하기 위해 제가 심문에 참석하였습니다.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범법자들에게 곤장을 20대 친 뒤 재판관은 제게 처벌에 만족하느냐고 질문했고 제가 놀라자 오히려 당황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판관에게 감옥행을 선고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제게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없어 국왕이 모두 석방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제가 만족할 수 있도록 자신이 유일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15일간 구류에 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간이 지난 후 도둑들은 재판관이 제게 말한 것처럼 방면되었습니다.

도적에게 이토록 관대한 이유는 조선인들에게 있어 이 같은 범죄는 사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도적질을 합니다. 고위관리들이 오히려 나쁜 선례로 작용합니다. 이들의 죄가 명백할지라도 보직이나 명예직을 박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민주호(Min Tchou-ho)[閔周鎬]의 경우 자신의 상관인 외척 민씨의 서명을 도용하는 사기 수법으로 홍콩 할인 은행(Comptoir d'Escompte de Hong Kong)에서 60,000프랑을 출금했습니다. 그는 현재 국왕의 비서입니다.
제가 각하께 이와 연관된 다른 사건 2건을 거론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2월 28일 독일 영사가 외무아문의 관리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초청 받은 관리들이 떠난 후 크린 영사는 거실에 있던 온도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외무아문 독판에게 편지를 써 절도 사실을 알리고 틀림없이 관리들을 수행하고 영사관에 온 하인들 중 한 명이 범인일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독판에게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하인들은 영사관 건물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관리들은 독일 영사가 그들 중 한 명을 범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편지는 상당한 동요를 초래했고 민종묵 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독일 대표에게 돌려보냈는데 독일 영사 역시 편지 수신을 거절하여 서신은 4-5일간 독일 영사관과 외무아문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결국 크린 영사는 이 정도면 범인이 경고를 받았을 것이며 충분히 교훈이 되었으리라는 판단 하에 자신의 편지를 거둬들였습니다.

영국 영사는 더 특이한 절도 사건의 피해자입니다. 조선 관리의 방문을 받던 중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집무실에 두었던 20여 피아스트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사관을 방문한 이 고위 인사를 절도범으로 함부로 의심할 수 없어 영국 영사는 첫 번째 면담 때와 비슷한 상황을 재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같은 관리가 방문했습니다. 집무실에 안내하기 전에 영사는 책상 위에 몇 달러를 놓고 대화를 시작했으며 핑계를 대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러자 결론이 명백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보니 돈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러한 수법은 상당히 교묘하고 능숙한 사람들이 사용합니다. 소심한 사람들은 단지 빌린 돈을 안 갚는 정도에 그칩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외교 대표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면 외교관들이 얼마나 난처한 입장에 처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수치심 없이 우리들의 난처한 입장을 악용합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빌린 돈을 일종의 기부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절대로 상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이 같은 해괴한 수법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어떤 요청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던 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외무아문의 협판이나 고위 관리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면 쉽게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경구.

콜랭 드 플랑시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각하께,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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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킴취님의 댓글

  • 킴취
  • 작성일
그 시대...어떤 외국인의 일본 기행문이였던가? 거기에...일본을 여행하는 사람은 도둑질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써있던데...진짜 하늘과 땅 차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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