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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미인자매의 기구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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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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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1012400239203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1-01-24&officeId=00023&pageNo=3&printNo=165&publishType=00020




미인이라 하면 얼굴만 고와서 되는 것이 아니요 태도만 어여뻐서 되는 것도 아니다. 얼굴과 태도가 다 맞아야 비로소 미인 소리를 듣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완벽한 미인이 드물어서 얼굴이 예쁘면 대개는 미인이라 한다. 그러나 처녀시절 김후동 씨야말로 얼굴과 태도와 수족까지 어디 한군데도 빠지지 않는 미인이었다. 발뒤꿈치까지 끌리는 그의 검고 윤기 있는 머리는 그의 아름다움을 돋우었다. (‘반복창 씨 부인 김후동 씨’, ‘동아일보’ 1926년 1월22일자)


연애를 상징하는 자줏빛 재킷을 걸치고, 연녹색 치마에 붉은 해당화빛 단을 대어 입고, 좀 갸름하고도 고와보이는 어여쁜 얼굴을 화려하게 단장하고, 옆으로 넘긴 트레머리에 일부러 두세 줄 머리털을 이마 앞으로 넘겨놓고, 굽 높은 구두를 발끝으로 디디고, 가는 허리를 맵시 있게 가누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양은 목석의 심장이 아닌 이상 누구이든지 그 요염한 아리따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점점 그가 아리땁다는 소문과 늘 속 빈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닌다 하는 풍설이 점점 널리 퍼진 결과 원동에 사는 재킷 입고 다니는 어여쁜 여학생이라 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거의 다 짐작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원동 ‘재킷’의 애사(1)’, ‘조선일보’ 1921년 1월23일자)



김화동은 무엇보다도 돈 있는 남자! 자기를 도쿄 유학생으로 만들어줄 남자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랑 구걸 편지’ 속에서도 천마디의 사랑한다는 사연보다 돈이 많으니 일본에 같이 가자는 한마디의 사연을 기다리고 고대했으나, 그를 사랑한다는 청년 중에는 그러한 팔자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3)’, ‘조선일보’1921년 1월25일자)



“참 세상에 별일도 많더라. 우리 집에 뚜쟁이가 찾아와서 그러는데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있는 어떤 청년이 인물 곱고 재주 있는 여학생을 구하는데 마음만 맞으면 일본에 데려가서 같이 공부를 하겠다더라.”

이 소리를 들은 김화동은 가라앉으려던 가슴이 다시 뒤숭숭해졌다.

“애 그러면, 그 뚜쟁이 집은 어디야?” 물으니 친구는 “뚜쟁이를 찾아가고 싶은가 보구나. 그렇지만 그 남자 돈은 있어도 품행은 썩 좋지 못하다더라”며 까르르 웃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5)’, ‘조선일보’ 1921년 1월27일자)



감언이설로 김화동을 일본에 불러들인 박석규는 김화동이 일본으로 건너오자 단지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만 대했다. 결혼을 하거나 공부를 시켜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한 달간 욕정을 한껏 풀고는 싫증난다며 다른 여성을 찾아 집을 나갔다. 얼마 후 혼자 남겨진 김화동에게 박석규의 조카가 찾아왔다.


“나의 당숙은 본시 한 여자를 데리고 석 달을 못 사는 사람이고, 고향에는 정식 아내와 아들까지 있으니 하루 속히 당숙의 품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원동 ‘재킷’의 애사(9)’, ‘조선일보’1921년 1월31일자)



김화동은 피눈물을 흘리며 도쿄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귀향 경비는 박석규가 구애할 때 사준 시계와 반지를 팔아 마련했다. 모친과 언니에게는 박석규와 한집에서 산 것은 사실이지만 결단코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한 달 남짓 지나자 김화동의 배가 불러왔다. 모친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며 가기 싫다고 버티는 김화동을 억지로 등 떠밀어 박석규에게 돌려보냈다.


두 번째로 박석규를 찾아간 김화동은 “생사를 그대에게 맡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박석규는 냉소를 지으며 “그처럼 호기 있게 가더니 다시 온 이유가 무엇이오. 바라건대 이 어리석고 못난 박석규보다 더 나은 사람을 구해 재미나게 사시오”하고 말했다.

치욕을 당한 김화동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다시 찾아온 줄 아오. 내 몸에는 그대의 혈육이 자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며 꾸짖었다.

박석규는 독기를 품은 웃음을 지으며 “툭하면 서방을 내버리고 달아나는 계집이 밴 자식을 세상에 제 자식이라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공연히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그대가 밴 아이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편안히 사시오”라 말할 뿐이었다.

(‘원동 ‘재킷’의 애사(11)’, ‘조선일보’ 1921년 2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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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 재킷’ 김화동이 유산한 지 불과 석 달 후, ‘원동 큰 재킷’ 김후동은 미두왕 반복창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2등석 특별열차를 대절하고, 서울 시내에 돌아다니는 자동차 3분의 1을 동원한 초호화판 결혼식이었다. ‘원동 큰 재킷’의 결혼식에 초대된 하객들 모두 ‘원동 재킷’이 지난 여름 한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형만한 아우 없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인천 외리에 짓던 반지로의 집은 실패를 볼 때마다 설계를 줄이고 줄이다가 나중에는 소위 만리장성 같다는 굉장한 돌담과 사백 평의 커다란 집터에 지어진 집은 네 칸짜리 움막이 되어버렸다. (‘눈물과 웃음의 40년사’, ‘조선일보’ 1939년 5월14일자)



벌써 김후동 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요, 며칠 안 돼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다. 들으니 그의 남편 반복창씨가 미두에 많이 실패하여 부부끼리 여러 가지 근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란 세상에 돌고 도는 것이니 잃은들 얻은들 무엇이 그리 신통하리오. 오직 신통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맺힌 세 개의 사랑의 열매인가 하노라.

“어머니 된 감상 말이에요?”

하고 그는 그 애교 있는 얼굴에 웃음을 듬뿍 띠면서

“아이 낳기 전에는 남편이 제일인 것 같더니 아이 낳은 후부터는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처녀 시절에는 자식이 무엇이 그리 중할까 그랬더니 막상 낳고 보니깐 그렇지 않아요.” 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을 양쪽에 앉히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앉았다. 그의 얼굴 가운데는 어머니로서의 만족한 빛이 가득했다.

(‘반복창씨 부인 김후동씨’, ‘동아일보’ 1926년 1월22일자)



김후동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바로 그 이듬해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모두 맡기고 이혼했다.







당시 일제시대때 김후동, 김화동 자매는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받았는데


김화동은 일본 유학가고 싶어서 도쿄 유학시켜줄 남자 구하다가 먹버당하고


김후동은 동생처럼 안되려고 조선내에 있는 부자랑 결혼했는데 결혼하자마자 가세 기울어서 이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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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허허..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김후동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한 바로 그 이듬해 반복창에게 세 아이를 모두 맡기고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아이가 소중하다며 바로 다음해에 세 아이 맡김 ㅋㅋㅋㅋㅋㅋㅋ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기구하다라는 표현과 참 잘어울리는 민좆

ㅇㅇ님의 댓글

  • ㅇㅇ
  • 작성일
조선인과 엮이며 살면..기구한 인생이 많을수밖에..영화소재나 뉴스거리는 많아서 특정직업군에는  좋을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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