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이라 불린 사나이>와 닛쇼마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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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적이라 불린 사나이>의 포스터(출처:네이버검색)
「요전날, 日本과 이란(イラン)의 외교 관계 수립 90주년을 맞아, 아베 총리(安倍 総理大臣)께서 이란의 로하니(Rouhani)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가졌는데요, 그 모습을 뉴스로 지켜보며 小生은 빙긋 웃고 말았습니다. 현재 미국(米国)의 이란 경제제재가 가속화되는 중이라, (이란에서는 경제전쟁이라 표현할 정도입니다.) 기자회견에 나선 두 사람의 모습이 실로 의미심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방에 포위된 이란의 양상과 중재자로 나선 日本의 기백에서 小生은 알레고리(allegory)처럼 영화 하나를 뇌리에 문득 떠올리고 말았다. 2016년 작품 <해적이라 불린 사나이海賊とよばれた男>다.
햐쿠다 나오키(百田尚樹)씨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日本의 전설적인 실업가(實業家) 이데미쓰 사조(出光佐三 1885-1981)씨의 일대기를 다루었으니 논픽션 작품으로 평가되어도 손색은 없겠다.
하면 이데미쓰 사조는 누구일까? 한마디로 록펠러가 米国의 석유왕이라 불리는 것처럼 그는 日本의 석유왕이다. 정유회사 이데미쓰 고산(出光興産)의 창업주로 혁혁(赫赫)한 활동을 거침없이 펼친 바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그가 일으킨 통칭 <닛쇼마루 사건日章丸事件>이라 할 수 있겠다. 전 세계를 경탄시킬 만큼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란과 연관되어 있는 일이니, 공교롭게도 지금의 정세로 보면 어떤 알레고리처럼 비치는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도 없겠다.
때는 바야흐로 昭和 28년, 서력으로는 1953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日本은 종전(終戦)으로부터 만 8년, 아메리카를 비롯한 서방국가와의 평화조약이 발효된 지도 겨우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때 영국(英国)의 보호령 신세였던 이란도 독립국이긴 했으나 영국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순 없었다. 그런고로 두 나라는 서방의 영향 범위에 놓여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발단은 쇼와(昭和) 26년, 이란의 모하마드 모사테크(Mohammad Mossadegh) 총리가 전격 단행한 석유 국유화 정책이었다. 여기에 발끈한 영국은 군함을 즉각 중동에 파견하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 이란의 석유를 매입한 유조선(油槽船)이라면 단연코 격침시키겠다고 전 세계를 향해 사납게 천명했다.
「이런 상황이니 누군들 영국의 날선 해상 봉쇄를 뚫고 이란과 거래하려고 하겠습니까? 모사테크 총리의 석유 국유화 조치가 오히려 이란의 경제 성장에 발목을 잡게 된 형국이나 다름없었지요. 영국의 무시무시한 금수(禁輸) 조처에 과연 누가 저항할 수 있을지 세계가 숨죽이며 주시하고 있었답니다.」
저항자(抵抗者)는 극동의 日本에서 곧바로 나타났다. 바로 이데미쓰 사조다. 그는 영국의 일방적인 해상 봉쇄야말로 서구 열강의 횡포라고 판단했다. 석유에 대한 금수는 경제부흥에 나선 日本과 이란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철폐되어야 마땅했다. 그렇게 확신한 것이었다.
이데미쓰 사조는 전격적으로 해상 돌파 계획을 세운다.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한지 면밀히 검토한 연후, 회사의 전무이자 막냇동생인 이데미쓰 케이스케(出光計助)를 이란으로 극비리에 보낸다. 이것이 1952년의 일이다.
물론 이란의 모사테크 총리는 이데미쓰 고산이란 회사가 메이저급이 아니라서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긴 협의 끝에 마침내 거래하기로 약속, 사조는 일대 용단을 내린다. 1953년 3월 23일 오전 9시 고베 항(神戸港)에서 대형 유조선(大型油槽船) 닛쇼마루를 출항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해상 돌파가 시작된다. 4월 10일, 영국 해군을 따돌린 닛쇼마루는 이란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 시점부터 전 세계에 닛쇼마루의 동향이 보도된다. 세계가 깜짝 놀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일약 국제적 사건으로 비약되어 버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4월 15일, 석유를 가득 실은 닛쇼마루는 이란을 당당히 떠난다. 추격전. 허나 갖은 우여곡절도 보란 듯 닛쇼마루는 의연히 극복한다. 영국의 집요한 해상 봉쇄를 뚫고 日本의 가와사키 항(川崎港)에 가까스로 귀환한 것이 5월 9일, 이데미쓰 사조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걸고 해상 돌파를 성공시킨 닛쇼마루의 영웅들을 맞이한다.
「얼마 전에 호르무즈 해협(Hormuz strait)에서 유조선이 공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잖습니까? 현재도 이렇게 피격당하는 마당에 당시 닛쇼마루는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겠습니까?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을 겁니다.^^」
그 뒤의 반향은 엄청났다. 분노한 영국은 닛쇼마루에 적하 된 석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이데미쓰를 日本 법원에 제소했고, 정부에도 그의 처분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론은 오히려 닛쇼마루의 무용담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영국은 10월 29일 제소를 취하(取下)하고 말았다.
하면 경제부흥에 질주하는 그때의 日本人들에게 이 사건은 어떻게 다가갔을까? 당시의 정세를 돌이키면 쉬이 유추할 수 있을 테다. 그들은 세계의 석유 시장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국제 메이저에 도전해 승리한 이데미쓰 사조의 강건한 용기와 위대한 결단과 치밀한 대처에 깊이 감동했다. 두터운 자긍심을 되찾게 되는 계기 중의 하나로 닛쇼마루 사건이 강렬히 작용한 것이었다.
예컨대 닛쇼마루 사건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던 2013년에 회사 이데미쓰 고산(出光興産)이 대대적으로 펼친 광고캠페인(廣告campaign)을 상기하면 한결 실감이 가리라. 그때 이데미쓰 고산은 각종 신문에 전면 컬러 광고들을 게재시키면서, 거친 바다를 거침없이 항해하는 닛쇼마루의 이미지를 싣고 헤드카피로는 “日本에 에너지를!” 그리고 “60년 전 닛쇼마루는 日本의 미래를 옮겼다!”라고 역설할 정도였다.
이 문구를 보고 당시를 떠올리면 누구라도 역동의 기운을 숨 가쁘게 느낄 만하다. 응당 소비자들의 반응도 활활 타오르고 남을 터다.
현재 出光興産는 창업자인 이데미쓰 사조의 “사람이 보유하고 있는 잠재력을 믿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 라는 좌우명(座右銘)을 승계 받아, “일본의 미래를 에너지로 지지해 갑니다!”를 모토로 삼고 있다.(댓글창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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