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일본의 독일군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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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은 영일동맹에 근거해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독일의 동아시아 군사 거점인 칭다오를 공격했다. 칭다오에는 3,650명 가량의 독일군과 100명의 중국 용병이 주둔했다.
8월 15일, 일본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용은 독일군이 중국과 일본 해역에서 철수하고 칭다오를 일본에게 넘겨주라는 것이었다. 독일은 무시했다. 다음날 일본 정부는 육군 보병 18사단의 카미오 미쓰오미 중장에게 칭다오 공격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8월 23일 최후통첩의 사한이 만료되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4년, 11월 16일 일본은 칭다오를 점령한다.
이 전투로 인해 4500명 이상의 독일인 포로가 발생했고 이들은 1920년까지 일본 각지에 있던 포로 수용소에 지내게 된다.
(1915년 1월 27일, 후쿠오카현 구루메 수용소)
이 날은 포로들에 의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생일 축하연이 있었다. 야마모토 시게루 중위가 포로들과 화기애애하게 담소하는 모습이 찍혀 있는데 야마모토 중위는 독일 육군 사관학교에 유학 경험이 있는, 독일어에 능통한 군인이었다. 수용소에서는 더욱 독일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포로 한 명으로 일본어와 독일어의 교환 수업을 한 적이 포로의 일기에 기록돼 있다 니노시마 섬 포로 수용소에서 독일인이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엽서들이다. 수용소의 매점을 이용하는 독일군 포로들 수용소 내에서 식당을 경영하고 이용했다. 소시지 만들기
독일군 포로 중 소시지 장인이 아사히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朝日新聞 1915.2.23朝刊 p.5 【YB-2) 제과점 독일 포로에 의해 히로시마에서 기술공예품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1919년 3월 4일) 히로시마 현 주민 16만 명이 이 전시회를 보러 방문했다. 유화, 수채화, 액자, 체스판, 군함이나 어함의 모형, 수용소 모형, 화로, 신발, 뜨개질 작품,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까지 전시품목도 다양했다.
전시품목을 자세히 보면 꽤 놀랍다. 포로 중에 기술자들이 많았던 것 같은게
• 예술 분야: 그림과 사진으로 구성, 그림은 대체로 유화, 사진은 수용소 내에서의 스포츠나 놀이 풍경으로 구성됐다.
• 수공예 분야: 미술•금속•목재 공예품으로 구성.
• 기술 분야: 건축, 기계제조, 전기공학, 선박, 항공기 모형 등, 주택 및 수용소 모형과 설계도부터 증기기관차와 전기 모터의 설계도와 모형, 구축함과 전투기 모형 등.
• 교육: 총 46명의 교사가 독일어, 수학, 공학, 화학, 헌법학, 지리 등에 대한 교육 활동을 진행
(그림, 꽃 등이 전시장에 늘어서 있다)
당시 포로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출처: 나루토시 독일관 반도 포로 수용소 자료) 포로들이 읽을 수 있게 독일어로 된 신문도 발행되었다.
독일 포로들은 문화 수준이 매우 높았다. 예를 들면
오케스트라와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즐겼고 일본인을 대상으로 서양 악기 연주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놀이를 즐기는 포로들) 연극이 이루어졌으며(사진은 셜록홈즈 각본)
인형극도 있었다. 수영과 경보 대회도 이루어졌다.
또 포로들끼리 축구나 테니스 팀을 만들어 근방의 일본인 팀과 교류 시합을 가지기도 했다.
히로시마 고등 사범 학교와 니노시마 섬 포로 수용소가 펼친 경기에서 독일 팀은 일본 팀을 상대로 5-0, 6-0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수용소 내 운동 풍경) 1차 대전은 이미 끝나고 포로들도 해방 직전이던 19년 11월에는 단체로 이쓰쿠시마 신사에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들은 19년 12월 말부터 20년 1월까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로 송환되었으나 약 170명은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현재 유하임(제과업), 로마이야(햄, 소시지) 등의 기업이 이 때 남은 독일인들이 세운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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