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국가인 일본의 활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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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전사자가 될 수 없는 전사자
미국에게 낯선전장이었던 한국전쟁에서 큰 도움주었던게 구일본군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인구,기후,군배치에 관한 세세한 기록을 제공하고,
항공촬영해서 제작된 지도 위에 특수공작원들의 정보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덕에 이런 지도들이 미군에 의해 한국전에서 활용되었다.
실제로 구일본군의 정보는 한국전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미국을 비롯 유엔군5만명이 동원된 인천상륙작전은 사실 한국전쟁 중 가장 위험부담이 큰 작전이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5m가 넘는 인천은 썰물때는 착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갯벌에 병사들이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어뢰탐지, 조작 그리고 수심, 어느곳으로 들어가야할지 등등 구체적인 지형정보제공을 담당한 일본인 육군대위는 나카노 특수공작관으로,
사령부정보관으로 오래있어서 한국 서해안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수밖에 없던 인물이다.
이들의 조사내용을 참고로 결정된 9월15일 오후5시는 30년만에 인천항의 수위가 가장 높을때였다.
결과적으로 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ㆍ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이자
한반도 역사를 바꾼 이 사건에는 일본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7만명을 상륙시키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당시, 전차양륙함(LST)의 6할(60%)은 일본인이 운행했다.
로버트 와이손(93세):
당시 미국 해병대원 "일본인은 이 지역을 다녀봐서 해안지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통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무라야마 후미하루(村山文治:92세): 당시 LST대원 "인천상륙작전에는 2000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대원으로 참가했다."
GHQ(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의 지휘를 받던 일본상선관리국에 소속되었던 LST Q086대원은 고베(神戸)에서 인천(仁川)으로 갔다.
LST Q042 선원 나카무라 카쿠이치는 임무중 사망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57명이 전쟁 수행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가장 큰 문제는 유엔군 전부대에 대한 원활한 보급이었다.
집중포화로 초토화 된 북한 지역은 대부분의 도로가 끊어져서 육로로 보급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원활한 보급을 하기엔 부산항은 너무 멀었다.
보급선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동부전선에 새로운 상륙항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했고 그렇게 원산상륙작전이 결정됐다.
그런데 문제는 바다의 복병기뢰였다. 상륙을 막는 기뢰가 원산 앞바다에 부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뢰를 제거해서 바다를 안전하게 하는것이야말로 원산상륙작전이 성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10월4일 극동권 해군사령관은 서둘러 일본정부에 소해정 참전에 관한 협조를 요청했다.
20척의 소해정과 함께 태평양참전, 당시 최고의 기뢰제거능력을 가진 일본소해대가 긴급 파견됐고,
당시 원산 앞바다에는 무려 3천개 이상의 기뢰가 집중 부설되어 있었다.
기뢰는 바다에 떠다니다가 부딪히면 폭발하는데 일본 소해대는 이 기뢰를 그물로 건져올려서 처리했다.
몇몇 민간인들의 참전 사례와는 달리 이들의 신분은 공무원이었고, 일부는 국가 의지로서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일본 소해대 기뢰작업이 끝나고 미군은 원산상륙에 성공하였고 원산뿐이 아니라 이후 미군의 상륙이 있을때 마다 일본 특별 소해대가 먼저 출동해서 기뢰를 제거했다.
한국전쟁동안 53척,1250여명의 소대원이 참전하였다.
+ 그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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